20180819 연중 제 20 주일(요한 6, 51-58)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면 서로 말다툼을 합니다.

 

앞서 해드렸던 식인종 유머는 한때 유행하던 적이 있었지요. 실제로 식인의 풍습은 카니발리즘이라고 하여 카리브 해 부근의 원주민 풍습을 일컫는 말로 쓰였습니다. 이를 인구 문제 해결을 위한 것과 적에게 공포를 주려는 목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식인의 풍습은 그 살과 피를 마시는 이에게 그 사람의 힘과 정령이 스며든다는 믿음. 그 미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동물의 살과 고기, 즉 호랑이나 늑대를 먹으면 그러한 힘이 전해질 거라고 믿었던 우리 조상들의 믿음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에 아연해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을 살과 피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면형무아라는 우리 영성의 궁극에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실재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기적을 목격합니다. 바로 사제의 축성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 가톨릭의 가장 핵심적인 믿음이며 교리입니다. 그리고 이 성변화의 근거는 명확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말씀하시고 특히 최후의 만찬 때 명확하게 예수님은 그 의식을 우리에게 되풀이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그 분의 힘과 영을 받아들입니다.

 

아니 다른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씹혀서 먹히려고 하셨던 그 희생제물의 의미, 그 사랑의 의미를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변화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성변화의 삶은 산 분들을 기억합니다. 그 많은 성인성녀들이 그러한 분이고, 우리가 현양하고 따르고자하는 순교자들이 바로 그러한 분입니다. 가까이는 마더 데레사나 콜베 신부님 같은 분들이 바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따른 분들입니다. 우리와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 살았던 정일우 신부님이나 소록도에서 한생을 바쳤던 축성 생활자 마리안느와 마가렛 같은 분들이 그러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매일 모시면서 우리는 그분의 관계맺음과 그분의 공생활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분이 그렇게 가르치고 전해주고 싶었던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고 성찰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 형제자매들에게 삶으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채근담이라는 동양고전에 이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한 집안에 보살이 한명 있으면 그 집안에는 평화가 머문다.’ 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 수도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정말 문제가 많은 공동체를 가만히 보면 희생이나 헌신하는 이가 없는 곳일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 하나라도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곳은 분위기가 다릅니다. 누가 더 능력 있고 누가 더 똑똑한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잘 삶의 척도는 누가 더 낮은 자가 되려고 하는가? 누가 더 희생하는가? 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는 능력이나 효용보다 희생과 겸손의 가치가 백배 천배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야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권력이나 명예보다 친절과 봉사가 더욱 강조되고 즐겨 칭찬 받게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대로 진리입니다.

 

내 살은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