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가회동에 있는 어둠속의 대화라는 공연을 보고 왔습니다. 어쩌면 공연이라고 하는 것보다 하나의 체험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깜깜한 어둠을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빛이 조금도 새어 들어오지 않아 눈을 뜨나 감으나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여덟 명의 관객과 한 명의 안내자가 있었는데, 우리는 이 안내자를 로드마스터라고 불렀습니다. 이 로드마스터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길을 헤매지 않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로드마스터를 따라 작은 숲을 지나기도 하고 모형 배를 타보기도 하며 음료수를 맛만 보고 맞추는 게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로드마스터는 거침없이 길을 안내합니다. 그리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분명히 이 로드마스터는 적외선 안경 같은 도구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 코너에서 로드마스터에게 질문할 수 시간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묻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에게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도구를 사용하고 있냐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로드마스터는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에 저는 놀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당연히 잘 보이기 때문에 길 안내를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오히려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름 사람들보다 어둠 속에서 더 능수능란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엘은 메시아를 만났다는 필립보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냐며 반문을 합니다. 나타나엘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적어도 나자렛 같은 촌구석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하고 더 멋진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타나엘의 기대와 다르게 누추하고 허름한 곳에서, 그것도 힘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1독서에서 언급되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카인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창세기 4장을 살펴보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거절하십니다.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거절하셨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적어도 제물을 거절하는 것이 그의 인격을 거부하는 것은 아님을 성경 본문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느님께서는 친히 카인에게 인격적으로 말을 건네십니다. 심지어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에도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보호하십니다. 카인은 이렇게 자신에게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그의 마음은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만 가득 차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비단 나타나엘과 카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에 매우 익숙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종종 수도자 성직자로 살아가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제 모습에 자책하곤 합니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만을 바라보다 보면 하느님의 부르심의 힘으로 살아가는 제 존재 가치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혹 누군가는 저와는 반대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더 많은 성취와 업적을 쌓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라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남들보다 잘나거나 혹은 못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 덕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알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