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얼마전 학교 수업 중에 성소 가치에 따른 욕구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성소적 가치와 양립할 수 없는 욕구들은 자기비하, 공격, 비난이나 실패를 회피하는 것, 상해를 피하는 것, 과시, 성적(性的) 만족, 애정의존 등 크게 일곱 가지로 분류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과시욕은 오늘 복음 말씀에 드러난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 좋은 인상을 남겨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효과가 빠르고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생길 때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식사를 대접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물건을 선물한다든지 하는 것이지요. give & take(기브 엔 테이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서 이와 같이 무언가 물리적인 대접을 하는 이유에는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전혀 사심 없이 내어주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보상심리라는 것이 있기에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 줄 때에는 조그마한 보답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 과시욕이라는 욕구는 관계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애정의존이라는 욕구와도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타인에게 무언가를 대접할 때에는 보상 받을 생각을 말고 나에게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저는 바라는 것 없이 거저 내어주라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무엇보다도 베푸는 행위에 대해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타인에게 뭔가를 베푸는 입장은 타인보다 형편이 낫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유가 있기 때문에 베풀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유가 있다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여유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경제적인 여유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의 여유입니다. 우리는 간혹 뉴스를 통해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몇 억을 기부하셨다거나, 김밥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평생 모은 전재산을 기부했다는 뉴스를 접합니다. 이분들이 그런 선행을 베푸시는데에 있어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에 베푸시는 것일까요? 그분들에게는 경제적인 여유보다도 마음의 여유가 더 크기 때문에 그분들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으로 일궈낸 결과가 타인에게는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거저 내어주는 것이지요. 바로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신 이유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우리가 베푸는 것에 대한 보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보답을 주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이 보답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소명입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 결코 철회될 수 없는 은사와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11,29) 그리고 우리의 삶 안에서 그 은사와 소명을 다할 때 우리는 그에 걸맞는 보답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삶을 택한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소명을 다하는, 마치 양초가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듯이 우리가 받은 은사와 소명을 소비해서 내 주변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양초가 자신을 태우는 이유는 다들 아시겠지만 녹아 없어짐으로써 주변을 밝게 빛내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내가 없어지는 무아(無我)가 되면 세상은 그만큼 더 밝아지는 것이 되겠지요.

복자사랑 피정의 집에서 소임을 하다가 본원으로 올라오게 되니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적어지고 그만큼 연락이 오는 사람들도 줄어듭니다. 그러한 사실이 때로는 일종의 상실감에 빠져들게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복음말씀을 묵상해보면 그 상실감들이 결국은 나의 과시욕 혹은 애정의존이라는 욕구에 기대어 나타난 결과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결국 저는 예수님을 등에 업고 있는 당나귀일 뿐인데 말입니다.

언젠가 누군가 수도생활을 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대답은 세상에서 잊혀지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저는 그 대답이 얼마나 교만한 대답이었는지를 반성해봅니다. 오롯이 하느님께 봉헌된 우리들은 진정한 기쁨을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나 내가 드러나 돋보이는 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생을 다해 실천해야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소명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침묵과 대월을 통한 무아(無我)가 되어 그 은사와 소명을 다하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주실 것입니다.(루카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