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뇌 시메온(축일 9.20) (Berneux Simeon)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5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 뒤 루아르(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375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377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626일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1841116통킹’(Ton King, 현 북베트남)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18433월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8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 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 후 10여 년간 모든 열성을 다해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1849년에 요동 지역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로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85485일 교황 비오 9(Pius IX)는 그를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다행히 조선의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60여 개 공소를 돌아보았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조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 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8월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 主敎 輪示 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서적이나 출판물을 저술, 정리하여 대량으로 출판하였다. 그래서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도 증가하였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년 대박해를 일으켜 그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1866223일 다섯 명의 포졸들이 주교 댁을 급습하여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베르뇌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신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이즈음에 도리(Dorie, ) 신부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36일 베르뇌 주교 일행은 참수형을 선고받고, 다음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장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렀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이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다 갖추었다.

사형집행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베르뇌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베르뇌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왜고개에 정성껏 장례를 지내고 모셨다. 그는 1968106일 교황 바오로 6(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