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의탁 베드로 수사의9월 22일 강론

작성자
용진 조
작성일
2022-09-23 14:02
조회
7613

+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헤로데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장본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뵙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인 그 사람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죠. 호기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그렇다면 헤로데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어떻게 마음대로 다루었는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의 결혼생활은 불법이었습니다. 자신의 배다른 동생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 아내는 원래 자신의 또 다른 이복형제의 딸로서, 자신의 조카였지요. 또한 그는 이 헤로디아와 혼인하기 위해 자신의 첫째 부인, 즉 나바태아 왕국의 공주를 버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불법적인 행위를 자꾸 건드리는 세례자 요한이 당연히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영향력 있는 예언자의 말이었으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는 자신이 이미 저지른 것이지요. 그 상황에서 오히려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뉘우친다면, 명예를 회복시킬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혹시 세례자 요한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저 사람만 없으면.” 혹시 이 말이 익숙하진 않으신가요. 이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지요.

사실 우리는 우리가 불편해하는 ‘옳은 말들’, 그리고 그 말들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악의를 품기도 합니다. 나를 건드렸다고,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나를 무시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지요. 하지만 내가 왜 그 말에 그렇게 불편해 하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옳은 말이고, 내가 잘못했다면, 고쳐야지요. 그건 고칠 수 있도록 오늘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요, 기회입니다. 하지만 나의 자애심, 욕망, 육체성은 언제나 ‘진실’과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합니다. // 저를 돌아보면서, 제 마음 안에서 얼마나 많은 예언자를 죽였던 것일까를 반성해보게 됩니다. 저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단죄하고 미워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그전에 먼저 그 나쁨이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했고, 그 옳은 말들이 제게 있는 악습들을 고칠 수 있도록 드러내 보여주는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분 나쁜 말들이 저에게는 축복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감정은 솔직합니다. 하지만 감정이 ‘나’는 아니지요. 오히려 여러 성인들에 따르면, 주님의 빛이 비추어질 때, 내 안에 있던 그 반대의 것들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표출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성경의 다른 장면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그의 어머니의 사주에 의해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했을 때, 헤로데는 두 가지를 괴로워했습니다(마태 14,3-12 또는 마르 6,17-29). 맹세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 때문이지요. 먼저 그가 ‘맹세’했기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것은, 하느님을 경외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춤구경으로 얻은 즐거움의 댓가로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몰상식하고 과도한 약속을 했지요. 그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평소에 맹세를 남발하였다는 반증이자, 사실 자신에 대한 과신이 그 배경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하느님께 대한 맹세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참된 예언자를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 저도 스스로 과신하여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했던 부도수표들이 많습니다. 사실 남에게 있어 보이려고, 아니면 제 스스로 꽤 괜찮은 수준의 나로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제 과신을 깨뜨리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제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실패와 수치를 보내주셔야 하실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에게 너희는 너희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하지 못하니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요(마태 5,33-37).

다음으로 헤로데는 ‘체면’ 때문에 요한의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깎이는 것이 싫습니다. 그만큼 진실보다는 이미지가 중요하고, 하느님의 인정보다는 사람들의 인정을 중요시합니다. // 저는 체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느라 진정 중요한 곳에 쏟을 힘을 낭비했습니다. 예의범절, 상식 이런 것들은 제가 저와 다른 이들을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이면서도, 많은 경우 저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겠나. 잘하자.’라고 스스로에게 속으로 말한다거나, 아니면 ‘아니,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상한 사람이야.’라고 속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죄가 아닌데, 그저 제가 생각하는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제 좁은 시야를 반증하는 것이며, 제 안에 그만큼 다양성을 품고 있지 못한다는 증거였습니다.

묵상을 마무리 지으며, 오늘의 제1독서인 코헬렛의 구절이 크게 다가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새로울 것 없이’ 언제나처럼 따사로우며, // 오늘 우리가 넘어지고, 뭐가 된 듯이 교만하고, 자신을 과신하며, 체면에 신경 쓰는 것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너무 자책하지도 말고,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헤로데처럼 살며 매일 나에게 보내주시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세례자 요한들’을 마음에 품고 나를 되돌아보며 회개의 삶을 살 것인가. 어떤 것이 하느님 마음에 들 것인지는 자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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