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의탁 베드로 수사의 9월 1일 강론

작성자
용진 조
작성일
2022-09-02 18:13
조회
6788

+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는 어부로서 겐네사렛 호숫가라는 일터에서 일하는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께서 삶의 현장으로 직접 오십니다. 예고 없이 말이죠. 사도들은 고기가 잡힐 때까지 밤새도록 배를 타고 호수 위에서 고생하는 삶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고기잡이가 그분들의 생업이었기에 물고기를 잡는데는 잔뼈가 굵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호수에서의 물의 흐름이라든지, 깊은 물 속, 고기들이 대략 언제 어디에 머무르는지 경험으로, 또한 전수받은 이야기로 많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전날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정말 고생은 말도 못했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녹초가 된 그들에게 과연 고기잡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을까 싶으신 예수님께서 한 마디 하시지요.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그 말을 듣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잘 아는 나’를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자신을 낮춥니다. 사실 몸을 일으켜서 예수님 뒤를 쫓아 따라 걷는 행위 이전에, 이미 베드로는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경험, 지식과 판단을 내려놓는, 바로 그 겸손이 있었습니다. 그 겸손을 통해 표징이 나타납니다. 그 겸손을 발판 삼아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 그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접하는 2000년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그 표징 말이지요. ‘두 배에 가득찬 물고기’ 표징을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겸손을 통해 당신께서 직접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겸손하셨을까요? 어떻게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바로 따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일까요? 어떻게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내려놓고, 힘든 몸을 이끌고, 예수님의 한 마디에 다시 밤새도록 사투를 벌였던 현장, 그 호숫가로 다시 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 질문들의 열쇠는 바로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날 밤에 있습니다. 바로 ‘완전한 실패’입니다. 매일같이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갔던 분들인데, 그 날 따라 물고기를 그냥 적게 잡은 것도 아니고, 한 마리도 못 잡은 상황이었지요. 그리고 ‘밤새도록 애를 썼다’고 한다면, 사도들이 아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을 것이고 자신의 지혜와 힘을 있는 힘껏 발휘했을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자연본성적으로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프고, 심하면 비참하고, 자존심도 무척 상합니다. 사도들처럼 그렇게까지 밤새도록 노력을 했는데 물고기 하나 못 잡아서 당장 내일 집에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상황을, 나 자신을, 주변 사람들을, 그리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완전한 실패’ 이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과 같이 그분이 오실 길을 다지고, 준비하는 역할을 ‘실패’가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신앙 안에서만 ‘실패’나 ‘아픔’, ‘고통’이 신비가 되지요. 제1독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저 모자란 사람들이나 낙오자들이 겪는 어리석은 일로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실패와 어려움을 통해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부수시고, 내 힘을 빼시고, 숨어있는 교만과 위선을 벗겨내시어 내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나를 낮추십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1코린 1,22-25)

 

그렇게 낮추어지고 난 다음에야 베드로 사도는 겸손으로 가득 찬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런 겸손과 경외심의 고백은 약간은 모순적인 형태를 갖는 것 같습니다. 즉 거룩하고 고귀한 어떤 것을 너무 원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차마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될 때 나오는 그런 표현으로 말이지요.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던 사도나 예언자들에게서 공통되게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라고 했던 것과 비슷하게, 예레미아 예언자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예레 1,6)라고 했던 것,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가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라고 했던 말들입니다.

오늘 다가오는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좋은 뜻이 무엇인지 찾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수요일 저녁기도 성경소구 : 1베드 5,5b-7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섬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낮추어 하느님의 권능에 복종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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