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의탁베드로 수사의 10월 20일 강론

작성자
용진 조
작성일
2022-10-21 17:42
조회
5852

+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두 가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부분을,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시면, 분열이 일어나는구나’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이란, 복음의 불이고, 성령의 불입니다. 그것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중에 클레오파스가 외쳤던 그 뜨거움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는가!”(루카24,,32) 또한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복음은 지상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합니다(로마 12,11 참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94.). 이렇게 타오른 우리 영혼의 내적 인간은, 제1독서에서처럼, 성령을 통해 굳세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에 뿌리를 내리게 하며,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알게 해줍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짓눌림 당하고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피의 세례를 받으셔야 했지요.

한편 예수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며, 한 가정 안에서의 불화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고 계십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의 분열이 의미하는 것은, 핏줄의 유대가 신앙의 유대와 일치하지 않는것이라고 말합니다 (『루카복음해설』, 7,136-38). 즉, 인간적으로 친하다고 여기는 것과 하느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의 친교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겁니다. 신비적인 의미에서, 교부는 각 사람은 하나의 영적인 집으로서 하느님의 집이거나 마귀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빛이 비추어졌을 때, 서로 갈라져 맞설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분법적이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우리의 나약함과 교활함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구원의 길을 헷갈리지 않도록 선택지를 딱 2가지만 마련해놓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o,x 퀴즈처럼 말이죠. 사실 이것은 성령의 인도로 쓰여진 성경의 그 첫 시작부터 반복되어온 맥락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가 생명 또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도록 창조하셨고, 그리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마음밭이 ‘밀밭이냐 가라지밭이냐’를 스스로 선택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의 선택으로, 일생동안 본성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은 하느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피조물이지만, 최초 인간의 타락으로 선을 행하기에 한없이 나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삶이라는 순례를 통해, 의지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며 구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선택한 ‘선’이 ‘덕’이 되고, 이 ‘덕’은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또다른 ‘덕’과 함께 우리 안에서 ‘제2의 본성’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얼마나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과목의 최종 점수는, 우리가 죽는 순간에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편 앞서 말씀드렸듯이,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은 다름 아닌 ‘성령의 불’입니다. 만일 주님의 빛이 비추어질 때 분열이 생긴다면, 인간적인 차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즉 우리 안에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는 영적인 세계에서 투쟁이 벌어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부모와 자녀, 며느리와 시어머니, 또는 같은 수도회 형제, 같은 반 동기들, 더 나아가 인간적인 관계 전체를 초월하는 차원에서 말이지요. 이를 다른 말로 이야기한다면, 어떤 분열 상황을 성령께서 허락하셨는데, 그 원인을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찾는다는 것은 진짜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는 것, 즉 ‘내 다리가 간지러운데 남의 다리 긁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현상 그 이전에, 주님께서 먼저 빛을 비추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제1독서에서처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내 삶의 첫 자리에 둔다는 것,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내 뜻이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내 영혼에게는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지금 눈 앞에는 부정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내 영혼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 따라서 ‘언제나 올바른 판단은 아버지께 있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주시며, 버릴 것은 없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오늘도 깨어서 기도하는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며 지상의 삶이 덧없음을 돌아보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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