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의탁 베드로 수사의 10월 12일 강론

작성자
용진 조
작성일
2022-10-12 22:15
조회
6523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오시기 전, 이스라엘에는 메시아께서 곧 오셔서 자신들을 구해주시리라는 종말론적인 희망의 분위기가 팽배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 당시에 에세네파와 같이 토굴에 들어앉아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많은 유다인들도 이런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겪는 고난들이, 하느님을 찾는 그들의 열심을 더욱 부채질했을 거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하느님께 충실해야지 마음먹은 사람들은 조상들에게 전해내려 온 율법을 열심히 지켰을 것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시 열심한 사람들은 마치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율법’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좋을 만큼, 목숨처럼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을 하고 모든 소득에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루카18,12). 지금 우리가 그들처럼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그렇게 살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혹시 보셨을지 모릅니다. 저도 듣기만 했지만, 거기 유다인들은 안식일이라고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생활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율법을 중심에 놓고 살았던 사람들의 대표적인 부류가 바로 바리사이들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그들을 질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에게 이득이 될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윽박질렀지요. 그리고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회당은 종교, 장터는 생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때, 이것은 그들이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대접받기 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느님 사랑을 하찮게 여기는 것과 자신을 높이는 것, 이 두 가지는 연결됩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하느님으로 섬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기를 바라기에, 겉은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은 죽어있는, 생명력 없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불행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인사받고, 인정받는 것처럼 보이며, 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이미 의로워졌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높이 올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뿌듯하지만, 그것은 참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행복하다는 느낌만 잠시 주는,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으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목마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 살았다고 말해준단들, 하느님께서 ‘아니다’라고 하시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 눈 감았고, 어떤 율법과 생활양식을 완벽히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쭉정이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알맹이가 없이, 규칙과 의무만 남아있는 율법주의는 생명력이 없어서, 주변 사람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그들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그런 상태를 일컬어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실 어제 복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잔의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담긴 선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익이 되는 실천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우리 속에 가지고 있는 것만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줄 수 없지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제1독서는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은 말 그대로 ‘우리 행위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 속에 그 열매들이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주신 것이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놓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것들을,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자신이 참고 힘들게 땀흘려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 것이니 내 맘대로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선별해서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돈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마치 성령의 선물들을 ‘내가’ 땀흘려 번 돈과 같이 사용하여, 내 욕구를 채우는데 쓰는 것입니다. 이로써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는 성경 말씀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내가 힘들게 기도했으니, 그것을 본 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줄거야. 나는 힘들게 절제하고 모은 것들을 십일조로 냈어. 십일조 안 낸 사람들은 나보다 못해. 인내심도 없고, ‘경외심’도 없어. 그러니까 나는 그들보다 괜찮은 사람이고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야.” 즉, 자신이 선한 행위를 한 목적은 자신의 자애심을 만족시키고, 남보다 높아지려는 야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그런 야심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겠지요. 우리가 겉보기에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선한 지향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회칠한 무덤과 같이 생명력이 없습니다. // 누군가 ‘그래도 행위는 선하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겠지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행위 자체를 좋게 쓰시는 것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위선적인 행위를 한 그 영혼에게 있어서는, 예수님께서는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야고보 서간에서는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야고1,16-17) 오늘, “내게 있는 좋은 것들은 모두 주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하루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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