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2011년 4월 26일 강론

작성자
수도회
작성일
2011-04-27 16:00
조회
1195

알렐루야 !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라며, 하느님 구원 계획의 결말을 선포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들어 올리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예고된 바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후 다윗 후손에서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임을 알려주셨던 그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고된 메시아이시며 임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 사명수행이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예언들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회개하라면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세례받는 이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없을 때에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고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찬 베드로는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곧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며 구원받을 것임을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들어올리시어 당신의 오른편에 앉게 하실 것이며 부활하게 하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너희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새로운 계약을 암시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우리들도 하느님께 다가가 용서받아 새로운 자녀가 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요한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뵌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마음 깊이 사랑했습니다. 막달레나의 사랑은 아침 일찍 무덤에 다가간 것을 보아서라도 알 수 있습니다. 막달레나는 그래서 매우 슬펐을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그분의 죽음을 바라보았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엄청난 슬픔에 잠겨있었습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고 생각했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그분의 시체마저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막달레나를 위로할 무언가가 전혀 없는 듯 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라는 말을 통해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나며 그분을 주님으로 체험하고 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슬픔은 예수님마저도 못알아보게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원문에는 예수님께서 “마리암”이라는 아람어 이름으로 부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막달레나에게 아람어인 “마리암”으로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히브리 말은 아람어를 뜻하는데, 막달레나 역시 아람어로 “라뿌니”라고 답합니다. 막달레나 역시 평소에 예수님께 아람어로 “라뿌니”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는 양에게 이야기하듯이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이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때 막달레나 역시 그 음성을 기억합니다. 당시 차별되던 여인에게 먼저 다가오셨던, 그리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주시고 다가와주신 그 음성을 기억하게 됩니다. 항상 옆에서 모셨던 분의 음성이 죽음으로 더 이상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슬픔에 빠져있던 여인에게 들렸습니다. 단순이 돌아가셨다고 판단한 것을 넘어서, 죽음을 넘어선 무언가를 막달레나는 체험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선을 긋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그 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선은 내가 힘들기 때문에 만들어놓은 선입니다. 힘들고 싶지 않아서 만들어 놓은 그 선은 정작 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 선을 지우는 것은 죽음과 같지만 부활은 그 선을 부술 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안의 어둠은 내가 아니라 타인의 것만 바라보게 합니다. 사실 내가 먼저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것도 그렇게 보입니다. 내 어둠을 먼저 바라볼 때, 그리고 슬퍼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부활의 시기 동안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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