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의탁 베드로수사의 강론_07.21

작성자
용진 조
작성일
2022-07-22 09:16
조회
137

+ 찬미 예수 마리아 요셉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씨뿌리지 못하는 척박한 광야에서 순정과 사랑을 바쳤던 이스라엘이

기름진 땅에서 하느님을 찾지 않고 반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백성 가운데에서 뽑혀, 마땅히 사랑받으셔야 할 당신을 경외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제와 율법교사, 목자들과 예언자들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 악행 중 먼저는, 하느님을 저버리는 악행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사랑을 거스름으로써 마음만으로도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이지요. / 다음은 ‘제 자신을 위한다’는 악행이 있습니다.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저버렸으니 물을 구할 다른 곳을 찾아다녀야 할 것입니다. ‘물이 고이지 못하는 저수 동굴을 팠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힘을 낭비했다는 것입니다. 물을 모아두고 사용하기 위해 만드는 저수 동굴이 갈라져 있다면 물이 모두 새어 나가버리게 되어, 만들어진 목적대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두 가지 악행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에게서 잘 드러나지요. 살아계신 아버지가 계신 집에서 더 이상 살기 싫어서, 유산을 챙겨 먼 고장으로 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저수동굴’을 팠지만 갈라진 틈에서 물이 새어나가듯이 그가 가진 재물도 빠져나가 빈털터리가 됩니다.

 

하느님을 떠나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거짓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결국 힘든 때를 만나고야 맙니다. 달리 보자면, 하느님께서는 그 힘든 시기를 허락하시며 마음을 돌리기를,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곳은 죽음의 길이며, 그 길의 끝은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할 힘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제가 많이 저지르는 잘못이기도 한데, 힘과 능력, 좋은 결과 등 주신 것에만 시선이 가 있어서 주신 분에 대한 감사를 자주 잊어버립니다. 주신 것을 내 것으로 취하고, 내 영광으로 삼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지금 하는 일들과 내 영혼 상태와는 별개입니다. 내가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이 성공하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내 영혼이 괜찮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착각이지요. 제가 강론을 잘해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눈물로 통회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제가 괜찮은 사람, 성덕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하느님께서는 필요하시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제1독서에서 언급된 ‘바알’은 하느님 아닌 우상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떠나 ‘제 자신을 위해 판’ 저수동굴이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들이지요. 이는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이들, 즉 예수님께서 비유로만 말씀하셔야만 했던 이들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과 계명을 저버리고, 그 길을 따라 걷지 않겠다고 거부합니다. 그분께 청하고, 그분 안에 머물면, 생수를 원 없이 실컷 마실 수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은 분명 손해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인간의 오염된 본성은, 일상의 편안함과 안락함, 쾌락들에 물들어 다시금 먼 길을 떠나자고 재촉하시는 성령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거부합니다. 그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갈망, 그 편안함을 보장받고자, 유지하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타인의 권리와 편안함을 희생시키길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 갈망의 불을 꺼뜨리기 위해서는 생수가 필요한데, 그 생수가 나올 곳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또 현대에서 일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우상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나 자신’은 피조물로서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젊음, 자신의 능력, 자신의 경험, 자신의 판단을 믿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다고 도둑질하는 어리석음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존엄성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감과 존엄성은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고, 이룩하고, 잘해야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의 눈과 귀는 행복합니다. 성서를 통해 예수님의 언행을 보고 들을 수 있고, 감실 안에 살아계신 그분을 직접 마주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체로서 주님을 우리 안에 직접 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신비의 샘 속에 푹 잠길 수 있도록, 우리의 감긴 눈과 닫힌 귀를 열어주십사 청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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