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복음나누기

베드로까니시오 수사의 강론

작성자
용진 조
작성일
2022-06-23 18:14
조회
3287

+ 찬미 예수님

저는 2019년도에 해외 사도직 실습으로 동티모르에 두 달 동안 머무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거기에 계셨던 수사님들의 배려로 2주는 언어를 배우고, 나머지 6주는 깊은 산속에 있는 공소 3군데에서 2주씩 지낼 수 있었지요. 벌써 3년 전이네요. 그 때 원장님이셨던 분과 본원에서 이렇게 같이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하하). 그 때 좋았던 기억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하나 굉장히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제가 갔던 시기가 마침 성모님을 위한 기간이어서, 감사하게도 성모님 상을 각 공소로 차례로 모셔가는 예식을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마치 가마처럼 생긴 들 것에 성모님 상을 모시고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릅니다. 한번은 한 공소에서 아주 먼 공소로 이동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땡볕에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걸으며 큰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제 기억에는 그렇게 거의 6~7시간을 걸어서 마을 어귀에 도착했었지요. 맞이하는 마을 어귀에는 그 마을 사람들이 전통의상으로 아주 곱게 차려입고 춤을 추며 성모님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예식을 합니다. 저는 마치 오지를 탐험하는 탐험가처럼 매의 눈으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지요. 저는 길고 긴 그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 찌푸리지 않고,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으며 집중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정성스러운 모습에서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왜 그 나라 이름이 라틴어로 경외심을 뜻하는 동(東)‘티모르’(Timor)인지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아기 요한의 이웃과 친척들이 경외심(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판에 글씨를 쓰자마자, 즈카르야는 묶였던 혀가 풀리고 하느님의 업적을 찬양하며 아기의 사명을 예언하지요. 이 표징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는 직접 사람들의 마음을 당신께로 돌리십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 또한 소문을 통해 들은 예언의 내용을 ‘마음에 새기’도록 만드십니다. 마치 엘리야의 기도에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직접’ 돌이키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경외심’은 ‘두려움’이라고도 표현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신구약에서 가끔 천사들이 발현할 때 그 발현을 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인간이 자기를 훨씬 뛰어넘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신비 앞에서 가지게 되는 ‘공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주석성경 각주22). 하지만 어떻게 ‘공포’가 ‘성령의 선물’이 될 수 있을까요? 언뜻 선 그 자체이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분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집회서(1,14)에서는 “지혜의 시초가 주님께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15,27)에서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통해 모든 이는 악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천명하지요. 이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께 대한 존경 때문에 어떤 것들을 마다하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자면, 마치 부모님의 마음을 상해드릴까 ‘두려워’ 올바른 길을 걸어가려는 자녀의 마음, 혹은 자녀들에게 악한 영향을 줄까봐 ‘두려워’ 나쁜 행위를 삼가고 좋은 삶의 표양을 보이려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이지요. 모두 사랑의 자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갖게 되는 이 경외심 때문에, 그릇된 쾌락을 멀리하고 절제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두려움은 은사들의 완성의 기초’라고까지 말합니다. 두려움을 통해 악과 결별하는 것이 성령의 다른 선물들을 통해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요한’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 은총의 사람이 받은 사명은 그의 아버지가 예언한 대로,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지요. 곧,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요한이 일생을 통해 외쳤던 회개하여라라는 외침과 같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와 용서를 받고, 구원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경외심’이 그 바탕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시고, 인간은 작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경외심’이라는 단어에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경외한다면, 그분 앞에서 피조물이 마땅히 가져야 할 낮은 자세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오늘 하루 경외심을 청하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교만으로 묶인 우리 영혼의 혀가 풀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 그리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요한의 겸손한 고백이 여러분의 노래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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