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지난 토요일에 재무위원회 세미나에서 마니산 등정을 하였습니다. 470미터 높이의 산을 각 공동체 재무위원 수사님들과 함께 두 시간 동안 오르며, 함께 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저는 수도원으로 돌아와서 짐을 정리하고 요즘 들어 부쩍 늘어버린 몸무게를 줄이고 싶은 욕심에 북악산에 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산에 오르기 시작한 지 한 시간 즈음 지났을 무렵 갑자기 어지럽기 시작했습니다. 발을 내딛기가 너무 힘들었고 이러다가는 내려가면서 무슨 일이 생기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가지고 간 휴대폰의 배터리도 거의 다 떨어져서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는 수도원에 있는 형제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해 차를 타고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에게 큰 도움을 준 우리 형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꾸벅~~)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재산에 대한 중재를 요청하는 사람과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마음에서 한 가지 공통된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안위와 개인의 만족을 위한 것을 채우려는 욕심입니다. 제가 무리해서 산에 오른 것 또한 제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지요.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체력의 한계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욕심은 우리 삶의 근본적 부분과 일상을 지배하고 우리의 성향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힘입니다. 또한 욕심, 다른 말로 욕구는 하느님과의 일치, 하느님과의 사랑에 결정적 작용을 하며 이 욕구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욕구가 오염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오염된 욕구는 우리를 고통과 번민의 삶에 머무르게 합니다. 무언가를 계속 가지려고 하고 채우려고만 하다보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만이 남아 우리의 욕구를 자꾸만 오염시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역시 그 욕구가 오염된 것이지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어떻게 하면 더 채울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부자는 늘어난 자신의 재화를 처리할 방법을 궁리한 끝에 더 큰 곳간을 짓겠다는 묘책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만의 묘책일 뿐, 하느님께서는 그 부자의 목숨을 되찾아가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재산을 모으고도 하루아침에 저승으로 가게 된 부자가 간과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부자의 소출이 어디서 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서 난 것입니다. 물론 거두어들이는 부자의 노력도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그 소출의 근원이 어디인지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여러 가지 작물들이 나오는 곳(창세 1,11-12.; 신명 26,2.)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들이 나오는 곳이 땅이라면 땅은 생명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명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한다면 부자가 가지게 된 것들의 근원도 생명이신 예수님이 됩니다. 그러나 부자는 예수님께서 주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재화를 이웃들과 나누거나 어떤 도움을 위해 사용하려는 마음보다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형제와 재산을 나누려는 사람도 마찬가지이지요.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교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는데 그분은 욕심이 없었을까요? 세상에서 더 즐겁게 지내고 싶지 않았을까요? 예수님도 죽음을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분명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계셨고, 또 십자가에서 희생하는 것이 온 인류를 위한 사랑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우리는 케노시스(kenosis), ‘자기비움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비워 내시고 십자가에서 희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빌려준 뒤에 다시 받아올 때는 되찾아 온다고 말합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도 부자에게 너의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루카 12, 2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목숨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목숨은 우리가 빌려 쓰고 있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려고 마음먹으시면 바로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누군가에게 어떤 물건을 빌리면 잘 쓰고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자기를 비워내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가지려하기보다는 나누려 하고, 채우려 하기 보다는 내어줄 줄 아는 삶이 바로 비움의 삶인 것입니다. 지상에서 비워내는 만큼 하느님 나라에 마련된 우리 자리에 보물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 달콤한 휴식을 뒤로한 채, 힘들어 하는 형제를 위해 단숨에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그 형제의 마음이 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보다는 타인의 어려움에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대로, 원하는대로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욕심을 비워내는 것은, 내어 놓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욕심은 정화가 되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시며 하느님께서 주신 이 삶을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각자의 삶에서 진정 비워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필 수 있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