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16 연중 제 24주일(마르 8, 27-35)

 

찬미 예수님!

 

사랑이 그대를

손짓하여 부르거든 따르십시오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험하다해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품을 때에는

몸을 맡기십시오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아픔이 그대에게 상처를 준다해도

사랑이 그대에게 말하거든 그를 믿으십시오

비록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의 꿈을

모조리 깨뜨려놓을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은 그대에게

영광의 왕관을 씌워주지만 또한

그대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도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대의

성숙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대를 아프게 하기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사랑은 햇빛에 떨고 있는

그대의 가장 연한 가지들을

어루만져주지만 또한 그대의

뿌리를 흔들어대기도 한답니다

 

칼릴 지브란의 사랑은 아픔을 위해 존재합니다.’ 라는 시입니다.

 

사랑은 불공평하다고 하지요. 더 사랑하는 사람이 늘 더 주고 싶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모르거나 그만큼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물론 위의 시는 연인들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지만 신학에서도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으로만, 하느님을 설명할 때도 사랑의 유비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을 종종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례자 요한,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라는 대답 후에 예수님은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질문하십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늘 화두를 던집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론 우리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분에 의해서 축성되고 우리의 자발적 응답에 의해서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 그리고 나의 주인. 주님.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는 삶. 그분이 나의 구원자가 되는 삶.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하고 맹서한 수도자. 그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당신의 제자로 살겠다고 그 삶이 세상이 주는 삶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고 선택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합니까?

 

제 얘기를 좀 하자면 전 좀 헛갈릴 때가 많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제도가 공고해지고, 물질적인 풍요와 인간의 개인적인 기호가 더 중시되면서 자기 성취가 행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가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 또 부와 쾌락이 행복의 전제조건이자 궁극목표가 되는 세상 안에서 그런 사람들과 살면서 그 영향하에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기도 합니다.

 

가난을 약속하고, 정결과 독신의 삶을 살아가고, 순명이라는 가치를 약속하는 수도 생활이 나에게 정말 행복의 바로미터가 되는가? 묻곤 합니다. 가끔은 이게 아닌데 하는 투정도 부려봅니다. 가끔은 인간 본성을 너무나 거스르는 계명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를 공고이하는 수단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져봅니다.

 

마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서, 바로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에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베드로는 사실 말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그분은 진정 주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복음과 계명과 수도회의 서원대로 사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었던 저처럼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한 것입니다. 수도 생활이 가끔은 덧없고, 수도원 형제들도 가끔은 참 한심히게 느껴지는 것처럼, 아니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커져가서 내 욕망과 원의를 이루고 싶은 그런 열망을 드러내면서.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받았던 사랑을 잊고, 지금도 주고 있는 그 사랑과 은총을 망각하고, 앞으로도 주실 그 엄청난 평화의 시간을 포기하는 저에게 그분은 또 꾸짖으십니다.

너의 어둠, 너의 위선, 너의 무지와 너의 게으름에서 벗어나라. 진정 하느님 나라에 한발만 걸치고 들어오지 않는 너의 그 교만을 벗어던지라. 너의 욕망과 너의 원의를 채우고자 나를 부르지 마라.” 하고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인간 사이에서 느끼는 호의와 사랑에서도 온 세상을 채울만큼 큰 기쁨과 위로를 받는데, 하물며 하느님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주시는 은총과 평화를 잊고 산다면 그 얼마나 한심합니까?

말로는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서 바로 그분의 뜻과 행로를 가로막는 이기심과 교만을 어찌해야 할까요?

 

장자에 보면 빈배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안개가 자욱한 날에 배를 몰고 가다가 앞에서 배 한척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자 비키라고 크게 소리칩니다. 그러다가 더 가까이 오는 듯하자 욕까지 섞어가며 고함을 칩니다. 그런데 막상 배에 부딪친 그 배에는 아무 사람도 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무안하여 입을 다물어 버리지요. 장자는 우리 자신을 이 빈배와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다툴 일도 성낼 일도 없다고 말하지요. 그것이 바로 빈배 영성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러한 빈배가 되어가는 여정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와 다투지 않고 굳이 성낼 필요도 없음은 바로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욕망과 결의가 가득하면 주님을 바라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가치와 의미로 다가오시는데 그 가치와 의미보다는 이익과 기호를 먼저 따지게 되니 말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은 사실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욕망과 집착과 애증의 복합이 아닙니까?

내가 흔들리더라도 사랑하고

내가 손해보다라도 사랑하고

내가 아프더라도 사랑하고

내가 죽더라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분이 가르쳐주신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그 끝없는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라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