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마태 19, 16-22)

 

어떤 사람이 교회에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누군가 조용히 기도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10만 원이 급하게 필요합니다.

지금 10만 원만 주세요." 새로 들어간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께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먼저 기도하러 온 사람이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서 기도하던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돈을 받은 사람이 "알렐루야!"를 외치며 나갔습니다.

그리고 돈을 준 사람이 의자에 앉아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

.

.


"하느님 이제 제 기도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오늘은 교회학자이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베르나르도 성인의 축일입니다. 오늘 강론은 베르나르도 성인의 아가서강론 중에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많은 지향과 감정과 정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피조물은

사랑을 통해서만 창조주께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과 같은 정도로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통하여 같은 방법으로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실 때 그 보답으로 사랑만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사랑하실 때 사랑을 받으시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으십니다.

 

신랑의 사랑은, 즉 사랑이신 신랑은 보답으로 다만 사랑과 성실을 찾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보답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신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 자체께서 사랑받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신부는 자신의 모든 여타의 정을 포기해 버리고 자신의 전존재로

사랑에게만 헌신합니다.

신부는 보답으로 사랑을 줌으로써 사랑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 안에 자신의 전존재를 쏟아 낸다 해도

이것은 영원한 사랑의 원천에서 흘러 나오는 그 분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자체이신 분, 영혼과 말씀이신 그리스도,

신부와 신랑, 피조물과 창조주, 그리고 목마른 사람과 샘에서 흘로

나오는 사랑은 그 풍요성에서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일하지 않다 해서, 즉 경주에 있어서 거인과,

단맛에 있어서 꿀과, 온유함에 있어서 어린 양과, 순결에 있어 백합화와,

광채에 있어 태양과,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사랑 자체이신 분과

겨루지 못한다 해서 혼인하는 이의 욕망과 애통하는 이의 갈망과

사랑하는 이의 열정과 간청하는 이의 희망이 사라지고 만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더 작아서 그분보다 덜 사랑한다 해도

힘을 다해 사랑한다면 부족함이 없고 있을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하는 이는 주님과 혼인했습니다.

이 정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혼인이란 양 배우자가 서로 합의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먼저 또 더 위대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