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7 연중 제 16주간 금요일(마태 13, 18-23)

 

찬미 예수님!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오늘 복음 말씀은 씨뿌리는 사람에 대한 해석입니다. 먼저 길에 뿌려진 사람, 돌밭에 뿌려진 사람, 가시덤불에 뿌려진 사람.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거나, 뿌리가 없어 박해나 환난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

 

악한 자는 어둠으로 볼 수 있겠지요. 우리 마음 속에 상처나 미움이 짙으면 그 마음이 하늘 나라의 가치와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니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지요. 마음 속에 어둠이 이끄는 대로 상실과 외로움과 우울과 더 깊게는 원망과 절망의 미로를 헤매게 됩니다. 그 심연이 너무 깊어 도저히 헤쳐 나올 수 없으면 더 극으로 가서 무의미와 공허의 바다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뿌리가 없다는 것은 하늘 나라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입니다. 가치로운 삶, 의미있는 삶의 귀중함, 그리고 그 작은 보석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하늘 나라를 조금씩 완성해 감을 깨닫지 못하고, 운명처럼 폭풍처럼 그런 일이 내 생에 우연히 일어나길 기다립니다. 그러니 강한 이의 윽박과 독한 이의 묘설에 쉬이 흔들리고 맙니다. 세상은 착한 사람이 손해다. 의인의 박해를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일리에 넘어지고 맙니다. 강하고 독하다는 말은 다른 이를 누르고, 속된 이들끼리의 연합과 지지로 형성된 카르텔이 하늘 나라의 가치를 짖누르고 부정합니다. 그것에 혹하게 되면 더 쉽게 넘어집니다.

 

특히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하늘 나라의 가치를 가장 위협하는 우상입니다. 세상의 논리와 재물의 힘은 교회조차도 좀먹고 들어와 복음의 가치를 왜곡 시킵니다. 예수를 부정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처럼, 예수를 못박았던 군중들처럼 우리는 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눈 멀고 귀 막히게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수확을 거두는 이는 누구입니까? 실재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는 밀 수확의 양과 비례한다고 합니다. 대풍년은 백 배요, 풍년은 예순 배, 평작은 서른 배의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과 의지보다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는 더 강하고 확실한 은총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노력으로 의지로 그분에게 가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그분을 향하게 하는 것도 그분의 은총이 아닐까요?

내가 선하게 또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조차도 사실 그분의 입김과 섭리가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그 작은 조각. 그 조그만 에너지의 흐름을 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일을 알아채고, 그분의 손길에 나를 맡기고 던질 타이밍을 봅니다. 그러한 마음조차도 움직이실 수 있는 그분 앞에 엎드려 애원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선택하고 따라 오라고 하시는 듯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관데 그분을 따르겠다, 안따르겠다 결정하겠습니까?

 

그 엄위하심 앞에, 그 위대하심 앞에, 그 완전하심 앞에, 그 전능하심 앞에, 무한하고 영원하며, 시작이요 마침이신 그분께 감히 무엇을 청할 수나, 아니 얼굴을 들 수나 있겠습니까?

 

그냥 지향이라도, 애원이라도 12년간 하혈을 하던 여인의 간절함으로 매달리고, 문간에 서서 감히 하느님을 쳐다보지도 못하던 세리의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 우리 몫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땅에 뿌려진 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데, 그 좋은 땅이 내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 땅을 이루시고 돋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비를 청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