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6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마태 13, 10-17)

 

찬미 예수님!

 

화창한 봄날 애기를 업은 아줌마가 버스에 탔습니다.

버스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애기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참 원숭이같이 생겼군요."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애기엄마는 버스회사 사장인 최불암에게 따지러 갔습니다. 모든 일의 진상을 알아차린 최불암은 정중하게 애기 엄마에게 사과했습니다. 최불암의 친절함에 아기 엄마는 감동을 받고 나가려는 찰나에 최불암이 업혀있는 애기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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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애완 원숭이 참 귀엽게 생겼네요."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칫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 그 신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로 들립니다. 성경 주석가들은 이를 이스라엘의 신비주의와 연관시켜서 종종 해석하곤 합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무나 이해할 수 없고, 선택받은 이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신앙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다음의 말씀으로 명확히 이해됩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곡해와 예수님을 모함한 일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으로 모함하고, 또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고 율법을 어긴 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기에 그들은 진실의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미운 놈 고운데 없고, 고운 놈 미운 데 없다는 옛 속담처럼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들 종교 율법의 근간을 흔드는 이단자요, 신성모독자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삶을 살고자 지향하지만, 용서하고 화해하고 따스하게 나누며 살고자 갈망하지만, 불현 듯 고개를 쳐드는 미움과 화는 잘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내가 준 것보다 작다고 느끼면 언제나 서운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무표정과 냉랭함 또 불쑥 뱉어내는 가시 돋친 나의 말투에서 내 마음을 헤아려 나에게 사과하거나 다시 따뜻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은 거의 내 마음과는 영 딴판이라는 점입니다. 그 사람은 또 그 사람대로 오해를 하고, 전혀 다른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 곳, 우리가 편히 쉴 곳은 이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노래한 칼릴 지브란의 시처럼, 우리는 나 중심에서 너 중심, 우리 중심으로 옮겨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포인트, 핵심은 바로 내 마음가짐과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 기도이고, 그러한 마음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 진정한 청원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을 성 요아킴과 안나 기념일입니다. 이분들에 대한 기록은 전승을 통해서만 내려오지만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가짐과 삶에서 이분들의 성덕과 의로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오롯한 신심과 인내, 그리고 깊은 침묵과 따름의 삶은 그들 부모의 삶을 긍정해주고, 설명해주는 최고의 지표인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 안에서 증명되고 깨닫게 됩니다. 역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늘 나라는 손에 잡히고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은총에서 시작되고, 우리의 지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신비는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