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3 연중 제 16주간 월요일(마태 12, 38-42)

 

찬미 예수님!


일주일 간 연피정 잘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최불암 시리즈를 한번 해 보지요. 최불암이 버스 기사였는데 어느 날 강도가 타서 칼을 들이대며 버스를 한적한 곳으로 대라고 했습니다. 최불암은 할 수 없이 한적한 곳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강도는 승객들의 돈을 빼앗고는 최불암에게 문을 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불암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강도는 화가 나서 최불암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문열어!”

그러자 최불암이 하는 말.


.

.

.


 

벨 눌러.”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화가 나서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악하고 절개 없는 이들에게 표징을 보여주기를 거절하십니다. 아니 사실 이미 예수님은 무수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12장에서도 이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셨고, 말 못하고 못 듣는 이를 보고 듣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 주님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또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꼬투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말합니다.

주님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 삼주야를 있었던 것처럼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암시하십니다.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말씀하시는 것의 핵심은 사실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에 있습니다. 왕부터 백성까지 심지어 짐승까지 자루 옷을 입고 횟가루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온 사건은 하느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징벌의 화를 면하게 한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인간의 회개가 하느님의 마음까지 바꾼 참 의미심장한 예인 것입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요나보다 더 큰 하느님의 아들을 몰라보는 이들 앞에서 주님은 화가 나신 것을 넘어서 어쩌면 측은한 마음이 드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진리를 구하러 솔로몬을 찾아온 남방 여왕도 예로 드십니다. 진리 자체이신 분을 앞에 두고서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심지어는 기적 앞에서도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다는 모함을 일삼은 이들 앞에서 예수님도 참 답답해하심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참 주님이라고 해도 힘겨워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의 마음이 강팍하게 흐른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됨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바꾸게 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지만 또한 우리가 그러한 지향과 의도를 가질 때에 비로소 가능함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복음의 가르침, 그 중심인 친교와 가치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은 사실 어떤 표징으로 확신을 얻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의미와 가치를 살 때, 사실 하느님 나라는 발생하는 것이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문장을 원문의 의미를 더 살려 번역한 이제민 신부님의 말씀을 빌리면, “때가 찼다. 하느님의 왕국이 네 손이 닿는 곳에 있다.”입니다. ‘가까이 왔다라는 말과 네 손이 닿는 곳에 있다라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손을 뻗으면, 우리가 그 가치와 그 의미를 살아내면 하느님의 왕국, 그 다스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