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2 성 토마스 사도 축일(요한 20, 24-29)

 

찬미 예수님!

 

늘 성당에도 열심이고 영성체도 잘 모시던 모니카 할머니가 어느 날부터 미사참례 때 영성체를 안 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걱정이 되어서 할머니를 미사 후에 따로 만났습니다.

모니카 할머님, 무슨 일 있으셔요? 왜 영성체를 안 하시는 거죠?”

모니카 할머니는 우물쭈물 하시더니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지가요, 속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었는데, 글쎄 의사 선상님이 당분간 밀가루 음식은 먹지 말라고 안하요.”

 

사도 성 토마스는 아마도 갈릴래아 출신인 듯하며 쌍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립니다. 성 토마스는 12사도 중의 한 명이지만 언제 그리고 어디서 사도로 뽑혔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는 라자루스(Lazarus)가 죽음에서 부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요한 11,16),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쭈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해답을 들었습니다(요한 14,5-6).

 

또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발현하셨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있을 때, 오늘 복음에서 보도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고, 이 때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최초로 인정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발현하셨을 때에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요한 21,1 이하).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성 토마스는 나중에 파르티아(Parthia, 고대 이란의 왕국)에서 설교하였고, 또 다른 옛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순교하여 마드라스(Madras) 교외 밀라포르(Mylapore)에 묻혔다고 합니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성인이고, 1972년에 교황 바오로 6(Paulus VI)에 의하여 인도의 사도로 선언되었습니다. 6세기부터 그의 유물을 에데사(Edessa)로 옮긴 것을 기념하는 축일을 73일에 지내왔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못자국을 직접 보고, 또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는 토마스 사도의 이 말은 그 후로 의심하는 신앙인의 대표적인 발언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또 이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이들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인간적인 영역, 물리적인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특히 과학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은 이렇게 물리적인 법칙을 초월하거나 신비로운 영역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자연적인 법칙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학적인 진리체계는 검증 가능한 것을 전제로 하기에 반박의 여지가 매우 적습니다. 하지만 신비적 신앙체계는 의미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이를테면 인간의 존재 의미와 삶의 목적, 가치 체계, 도덕체계, 그리고 내세에 대한 믿음등을 다루기에 그 출발에서부터 검증 가능한 영역과는 매우 다릅니다.

 

과학적 진리체계는 그 자체로 중요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반박불가의 진리체계와 의미론적이며 존재론적인 신앙체계를 같은 선상에서 다루는 것이 사실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세의 신앙체계 안에서는 물리적 자연법칙까지 교회가 관여하고 간섭하였기에 지금의 이러한 적대적인 관계가 생겨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보이는 영역보다 보이지 않는 의미론적 영역이 참 중요합니다. 젊었을 때, 누구나 한번은 깊게 고민해 봤던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라는 물음에 사실 과학이 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한 학생의 주장은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유전자 조작하는 실험의 윤리적인 부분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왜냐하면 과학자는 기술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지, 그 결과까지 미리 책임질 필요는 없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 신앙이나 도덕적 가치 체계가 없는 과학이란 이렇듯 무시무시한 괴물이 될 수도 있구나. 인간 삶의 목적이나 의미에 대한 재고나 성찰이 없는 기술의 진보는 정말 두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발언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정말로 확실하게 그분을 나의 주님, 나의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싶다는 그 바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토마스 사도는 바로 대답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우리도 이렇게 토마스 사도처럼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을 갈구해야 합니다.

 

토끼를 쫓는 사냥개가 지나가면 온 동네의 개들이 다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끝까지 토끼를 쫓는 개는 그 토끼를 본 개라고 합니다. 덩달아 짖고 쫓던 개들은 힘들면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것이지요.

 

나는 토끼를 본 것인가? 나는 그분의 못자국에 손을 넣어 본 것인가? 아직 미진하다면 더욱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내게로 오시도록. 아니 내가 그분께로 가도록.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