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6 연중 제 12주간 화요일(마태 7, 6. 12-14)


찬미 예수님!


우리는 왜 용서보다 복수에 열광하는가? 복수의 심리학은 인간의 욕구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욕구 중 하나인 복수라는 심리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몇 구절 소개해 드립니다.


복수는 개인의 안녕, 영토, 긍지, 명예, 자존감, 신분, 역할을 위협하는 것들을 억제한다. 앙갚음은 부당한 행위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수는 이지러진 평형과 서열을 재설정한다. 복수는 개인 간 암투, 집단의 내분, 노사 분쟁, 내전과 국제전에 존재하는 암묵적 관습법이다. 자아와 공동체의 궁극적 자기 진술이다. 타인의 침범을 막는 방어 수단이자 경고 조치다. 날것 그대로의 정의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 복수자다. 다만 우리의 머리는 다른 말을 한다. 우리는 개인 차원의 복수는 억제해야 하며, ‘정부 당국’, 다시 말해 공권력에 위임해야 한다고 배운다. 우리 사회에는 복수를 제한하기 위한, 그래서 통제 불능의 복수 활극 사태를 막기 위한 사법 제도가 존재한다. 종교도 여기에 논쟁적 목소리를 보탠다.


복수를 통해 인간 조건에 대한 어떤 성찰이 가능할까? 복수에는 비난이 따르지만 정말 항상 비난받아 마땅한 것일까? ‘좋은 복수나쁜 복수사이에 결정적 전환점이 존재할까? 생각해보라. 우리가 항상 복수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규칙을 어겨서라도 잘못을 바로잡는 복수자에게 때로 신나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또한 우리는 정당화된 복수를 명분 삼아 전쟁을 한다.”

이 책에서는 복수가 항상 우리 생각처럼 낯선 괴물이 아니며, 나아가 여러 면에서 우리는 복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황금률에 관한 것입니다. 황금률의 유래는 3세기의 로마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이 구절을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인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내용이 논어에도 있지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로써 황금률의 금지 형태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받은 은혜나 호의도 갚고 싶어하지만 앞서 든 책에서처럼 남에게 받은 상처와 무례도 되갚아주고자 합니다. 사실 호의보다 악의에 대한 복수가 우리의 마음을 온통 점령할 때가 많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아도 어떤 날은 무척이나 화가 나서 그 화가 나란 존재를 온통 집어삼킬 때가 있습니다. 특히 자존감에 상처를 입거나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그 분노와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르기 힘듭니다. 앞서 책에서 나온 내용처럼 부당한 행위에 대해 그 이지러진 평형을 되찾고자 하는 앙갚음의 마음이 강해지고, 그것이 정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황금률의 토대는 진실과 선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거룩함의 평화를 전하는 것임을. 호의와 배려의 친교를 이루고자 하는 원초적인 내 바람을 남에게도 적용하는 것임을 우리는 명확히 알 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언행을 하게 되는 동력인 마음의 문제이지요.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수행의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강력한 효과가 필요합니다. 그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하신 모범이며 그분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네가 행하는 복수가 너에게 그대로 미칠지니 너는 그 복수의 마음을 용서와 화해의 호의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저변에는 네 힘으로 불가능하니 내게 기대라. 너는 너의 약함과 모자람과 악함까지 내게 드러내고, 내게 의탁하라하시는 가르침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청되는 것은 솔직함입니다. 용서와 화해에 너무 치중하여 내 마음의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누르거나 없애려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 화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제하고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나 지금 화나요. 저 사람이 저 형제자매가 미치도록 미워요. 하고 주님께 그대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 도와주십시오. 그러니 주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스스로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거룩한 것처럼 당신이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를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당신이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해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라는 육신의 약함과 원초적 유혹에 이끌림 때문에 죄에 빠지고 그것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완전함은 당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당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해 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으로 인해서만 온전해짐을 믿고 바라게 하소서.”라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추구해야할 완전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분의 현존 안에서 그 신성을 발생시킬 때, 우리가 우리의 약함과 악함까지 봉헌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바로 내 마음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꾹꾹 눌러 참고 회칠한 무덤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장하지만 마음속은 지옥불의 겁화와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그 상황이 참 신비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날것 그대로의 정의가 필요한 때도 있겠지만 돌아보면 대부분 후회스럽지요. 진실하고 착하며 아름답게 그리고 거룩하게 살아가기에도 모자란 시간,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주님께 의탁하며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비록 좁은 문처럼 보이지만, 어찌 보면 참 쉬운 길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이 택한 행복의 길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고, 하느님의 다스림을 이 세상에 초대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약속하고 축성된 이들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