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4 부활 제 7주간 목요일(마르 9, 41-50)

 

찬미 예수님!

 

밤늦게 자율학습 끝나고학교 정문을 막 나서는데,

한 할머니 한 분이 보자기를 펼쳐놓고 연습장처럼 보이는 걸 팔고 계셨습니다.

학생은 마침 연습장을 다 써서 필요하던 참이라 하나 사려고

할머니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겨, 등이 오싹해졌습니다.

할머니, 이 연습장 사고 싶은데 얼마예요?”

학생, 1000원이야.”

, 한 권 주세요.”

할머니는 연습장을 건네주며, 갑자기 학생 팔을 잡더니,

학생, 절대 연습장 제일 뒷장은 펴보지마. 특히 밤에 방에 혼자있을 때라며, 무서운 표정으로 학생을 노려보았다.

학생은 좀 오싹했지만, 연습장이 맘에 들어 대충 대답하고 집에 왔습니다.

방에 들어와 생각해보니, 점점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학생은 너무너무 궁금했습니다.

제일 뒷장을 펴면 무슨 일이 생길까.

너무 무서웠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학생은 그만 보고야 말았습니다.

제일 뒷장을.

그리고 경악했습니다. 거기엔







500.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 작은이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고, 손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잘라 버리라고 하십니다. 또 발이 죄를 지으면 그것도 잘라 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좀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를 실재로 행한 교부가 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오리게네스 교부입니다. 가톨릭 사상 천재 중의 천재로 꼽히는 그는 또한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교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젊은 처녀들을 가르치는 직무에 있을 때, 스캔들을 우려하여 스스로 거세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처럼 죄를 짓지 않고, 그 유혹의 싹을 자르겠다는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후에 이는 여러모로 문제가 되고 논란의 여지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 또한 매우 위험할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미치겠다. 죽고 싶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정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심각하다는 표현이며 과장법인 것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은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죄에 대한 유혹에 대해서 스스로 철저히 조심하라는 것이고, 그렇게 죄에 대한 유혹은 강력하다는 경고라고 말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욕망은 우리 서원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습니다. 정결은 성욕과 가난은 소유욕과 그리고 순명은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자유의지와 밀접하고 아주 강력합니다. 이러한 본능적 욕구는 그 자체로는 무기, 즉 선악이나 윤리적인 잘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로 드러나는 언행과 결과에 따라서 죄가 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욕구가 그렇게 강력하고 때로는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순간의 쾌락과 또 나의 이익이나 안전을 위해서 그릇 되이 사용되는 것을 경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먼저 자신의 양심과 마음의 평화를 해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멀어져서 암흑과 같은, 지옥과 같은 상태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몇 배의 벌을 받게 됩니다. 연자맷돌을 걸고 바다에 빠지고 손과 발을 자르는 고통을 이미 마음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은 소금에 관한 말씀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고 주님은 우리에게 반문하십니다. 우리에게 소금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짠 맛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배려와 따스함과 통교의 친교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정서적인 깊은 친밀함을 느끼는 도반과 공동체에서 기쁘게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먼저 선취할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