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수도회에 입회하면 수도생활은 가재리 신학원에서 시작됩니다. 제가 지원기를 시작했던 신학원에서는 그 당시 한 학기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정도 문화 활동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같이 지내는 수사님들과 영화도 보러 가고, 또 그 동안 맛보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이지요. 지원자로 약 9개월이라는 시간을 지내고 있던 그 때, 신학원에서는 문화 활동으로 수원 시내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아갔습니다. 입회하기 전에는 너무나 쉽게 다녔던 패밀리 레스토랑이지만 오랜만에 찾아 온 뷔페 앞에서 형제들은 이것저것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느라 바빴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 책임자로 동행했던 어떤 수사님이 식사를 다 마쳤냐고 물었습니다. 평소 달콤한 음식을 좋아했던 저는 마지막으로 와플을 더 먹겠다고 애기하고 음식을 담으러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와플에 발라진 달콤한 생크림과 잼을 보며 흐뭇해하며 자리로 돌아온 순간 저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식사하던 그 자리에 형제들은 온데간데없고 한 점원이 열심히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창피함과 황당한 마음을 뒤로 하고 점원에게 당당하게 식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점원은 저쪽 한 쪽으로 가서 식사를 마저 하라며 제 수저도, 제 포크도 아닌 자리에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은 접시에 한 가득이고, 자리는 사라진 상황에서 제 머릿속은 하얘져 버렸습니다. 그 당시 저는 준주성범이라는 책에 심취해 있어서 이런 모욕적인 상황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 믿으며 음식을 남기는 것보다는 모욕적인 상황을 견디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앉아서 그 음식들을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쳐 넣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는 동안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수도원이라는 공간에 와서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내 가장 친한 친구들도 이런 장난을 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하물며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수도생활을 선택한 이들은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수도생활인건가..., 여기서 계속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오늘 독서에서 이야기하듯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비뚤어진 생각을 시작한 것이지요.(지혜1,3)

화가 난 상태로 음식을 입에 처넣고 식당 밖으로 나온 저는 저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는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저는 모욕을 견디면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상황을 꾹 참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원으로 돌아오는 차에서도, 그 다음날 식사 시간에도, 학교에 다녀온 뒤에도, 기도시간과 밥 먹는 시간 외에는 형제들과 어울리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든 형제들이 미웠고, 수도원이 싫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이곳이 과연 수도원인가?’하는 생각과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결론은 점점 수도원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과 생활로 한 달 정도를 지냈을 무렵 식당에서의 장난을 주도했던 수사님이 조심스럽게 저에게 다가와서는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재밌으려고 한 장난인데, 저에게 그렇게 큰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 사과를 받는 순간 저에서 그 수사님을 미워하던 마음과 수도원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들은 녹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저는 사람을 면박 주는 장난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상황들을 맞닥뜨립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상황들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 혹은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변수로 작용하는 그 상황들 안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지향하는 바가 선이라 하더라도 그 선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로 인해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말이 있지요? 돌을 던지는 사람이 개구리를 죽이려고 그랬을까요? 그냥 습관처럼, 혹은 재미삼아 던진 그 돌이 개구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에 이렇게 하면 재밌겠지 라고 생각한 일들도 그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결코 재밌는 일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준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게하기도 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루카 17,1)라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기쁨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형제들을 선동하여 저에게 그런 장난을 친 그 수사님만 잘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저 자신도 잘못한 일이 있지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수도생활은 그저 수도원에 산다고 해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도 굴곡이 있어야 탄탄해지듯이 수도생활 역시 많은 시간 동안 여러 일을 겪은 후에야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준주성범이라는 책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갈고 닦으며 하느님을 만나고, 때로는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하던 때도 겪었던 연륜 있는 수도자가 집필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런 책을 보며 이제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원자가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했으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그런데 지금도 그때의 그 장난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형제들에게 화를 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과 다투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말 안하고 지낸 한 달이라는 시간을 죄 속에서 살기보다는 기쁨 속에서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일방적인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한 쪽이 잘못해서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요즘은 9:1정도의 비율로 과실을 매긴다고 합니다. 저를 식당에 남겨두고 나가버린 수사님들도 잘못이지만 저만을 생각하며 모두가 저를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여겼던 저도 잘못입니다. 제가 그런 모욕적인 일을 겪고도 지금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수사님도 나름의 성찰을 통해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였고 또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구하는 사람도, 용서를 하는 사람도 더욱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유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죄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이 말씀을 저는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오늘을 보내며 과연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진 않은지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자유를 선물해 줄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