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고통 (나름요약)

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 / 1984

 

 

고통의 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얻자면,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궁극 원천인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계시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은 또한 언제나 하나의 신비로 머물러있게 마련인 고통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가장 풍부한 원천입니다. 사랑은 또한 고통의 의미문제에 대한 해답의 가장 충만한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해답이 하느님에 의하여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1. 구원-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결정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

 

인간은 영생을 잃을 때에 멸망합니다. 구원에 대립되는 것은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단순히 현세적인 고통이 아니라 결정적인 고통, 즉 영생의 상실이요, 하느님에게 배척당하는 것이며, 영벌인 것입니다. 외아들 그분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일차적으로 이 결정적인 악에 대항하고 결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의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초월적인 악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이 초월적인 악의 뿌리들은 죄와 죽음이라는 땅속에 뻗쳐있습니다. , 죄와 죽음이야말로 영생을 상실하는 장본입니다. 외아들의 사명은 죄와 죽음의 정복에 있습니다. 그분은 죽기까지의 순종으로써 죄를 극복하시는 것이며, 부활로써 죽음을 정복하시는 것입니다.

 

외아들께서는 당신 구원사업에 의하여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십니다. 우선 첫째로는 원죄와 더불어 비롯하여 악령의 영향력 아래 인간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린 죄의 지배를 불식하시며, 그 다음으로는 인간에게 성화은총 속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신 데 이어, 또한 미래의 육신 부활을 시작하는 당신 부활에 의하여 죽음의 지배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영생, 즉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결정적인 행복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고통이 완전히 불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고통의 세계에 구원의 빛으로 던져주셨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의 결과로 인간은 영원한 삶과 거룩함의 희망을 가지고 지상에 실존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가 인간의 삶에서 현세적인 고통을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며, 인간 실존의 역사적 차원 전체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 차원과 모든 고통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 구원의 빛을 던져주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복음 곧 기쁜 소식의 빛입니다. 바로 이 빛의 핵심에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개진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요한 3,16)라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역사와 현세적 상황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 죄가 태초 이래의 유산인 원죄로서나 세상의 죄로서나 또 각자의 본죄들의 총계로서나 현세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계속해서) 사랑해오신 것이고, 다시 말해서 영원히 사랑하고 계신 것이고, 때가 이르러 마침내는 바로 이 비할 데 없이 드높은 사랑을 통하여 이 아드님을 주심으로써, 이분이 바로 인간의 악의 뿌리 자체를 쳐부수고 인간이 참여하고 있는 고통의 세계 일체에 구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게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구원사업 완성하셨다.

 

이스라엘 한복판에서 메시아로서 활약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의 세계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셨고, 괴로운 이들을 위로해주셨으며,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을 귀먹음에서, 눈멈에서, 문둥병에서, 악마에게서, 갖가지 신체적 장애에서 풀어주셨으며, 죽은 이들을 소생시켜주신 일도 세 번 있었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고통이든 영혼의 고통이든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가르침을 주셨고, 그리고 동시에 그분의 가르침에 있어서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여덟 가지 행복의 선언이었는데, 이것은 현세생활에 있어서 갖가지 고통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인간 고통의 세계에 다가오셨는데, 이것은 그분이 이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이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10,33-34)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며, 바로 이런 방법으로 당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여야 하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인류 역사와 인간 영혼에 뻗어내려 있는 악의 뿌리를 쳐부수셔야 하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구원사업을 성취하여야 하신 것입니다. 이 사업은 영원하신 사랑 계획 속에서 구속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4. 구속사업- 고통받는 종의 넷째노래와 게쎄마니에서의 고통.

(구속: 救贖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함)

 

성서의 말씀은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메시아에 관한 수많은 대목들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장차 주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분이 겪을 고통들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져있었습니다. 이 모든 대목들 가운데서도 특히 감동적인 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통칭 고통받는 종의 넷째 노래라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적 고통의 주체인 단일한 위격이 지니고 있는 본성의 이중성에 접하게 됩니다.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에 의하여 구속을 이루어주시는 그분이 하느님께서 주신외아들이시며 또 동시에 이 하느님과 동일한 본체이신 아드님이 한 인간으로서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은 인간의 차원들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또한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심도와 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게쎄마니에서의 기도야말로 여기서 하나의 결정적인 요점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라는 말씀과 그 다음의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42)라는 말씀은 여러모로 하나의 웅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며 바치는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당신 고통의 진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고통의 진실을 통한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로 깊은 차원에 있어서의 고통의 인간적 진실을, 즉 고통이란 인간이 그 앞에서 전율하며 악을 겪는 일임을 지극히 단순 명료하게 긍정해주고 있습니다. 무릇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게쎄마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똑같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1베드 1,18-19)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코린 4,8-11.14)

5.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바로 이것이 이 사도의 표현들에서는 이를테면 이중의 차원을 띠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고통을 인간에게 열어보여 주셨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의 구속적인 고통 속에서 어떤 의미로는 모든 인간 고통에 참여하는 분이 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을 발견할 때, 또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고통도 발견하게 됩니다. , 신앙을 통하여 고통을 재발견하게 되어, 그 고통이 새로운 내용과 새로운 의미를 띠고 풍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신앙을 통하여 이 말씀의 저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까지 이끌어간 저 사랑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고통받고 죽으시면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셨다 할진대, 그분은 이 고통 및 죽음과 더불어 당신이 이토록 사랑하신 그 사람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 사람 안에, 곧 바오로 안에 살아계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바오로가 신앙을 통하여 이것을 의식하면서 그분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있는 그 만큼- 살아계시기에, 그분은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곧 바오로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치되십니다. 이 일치로 말미암아 바오로는 같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또 다른, 조금도 못지않게 힘찬 말씀을 써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 6,14)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들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이 영광에도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7-18)

 

6. 인간의 약점인 고통을 통해 하느님 권능과 융합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파스카 신비의 첫 단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약점과 무능의 극한에까지 내려오십니다. 참으로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약함 속에서 그분의 들어 높여지심이 성취되어있으며 또 이것이 부활의 권능에 의하여 긍정되어있다고 할진대, 그렇다면 이것은 모든 인간 고통의 약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바로 그 하느님의 권능과 융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고통을 겪는다 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베풀어진 하느님 구원 능력의 역사하심에 특별히 민감해진다는 것, 특별히 거기에 마음을 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고통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이며 자기 비움인 고통을 통하여 활동하고자 하시는 당신 원의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약함과 자기 비움 속에서야말로 당신 능력이 알려지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1베드 4,16)

 

 

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 당신 자신의 구속적 고통을 모든 인간의 고통을 향하여 열어놓으셨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그리고 또 다른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는 수신인들에게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1코린 6,15)라고 묻고 있습니다.

파스카 신비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의 결합을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이 파스카 신비에서 교회의 신비가 표현됩니다. ,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이루어주는 세례성사의 행위에서 이미, 또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 성사적으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 교회는 끊임없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건설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개인 각자와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또 특별히 고통받는 사람들과 결합되십니다.

 

위에서 인용한 콜로새서의 말씀은 이 결합의 예외적인 성격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대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자기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것과 똑같이 - 비단 그리스도로부터 이미 지적된 그런 힘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고통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있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적으로 내다보고 있는 눈이 특히 고통의 창조적 성격에 관한 진리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세계를 구속하는 선을 창조하였습니다. 이 선은 그 자체로는 무량하며 무한합니다.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구속적인 고통을 모든 인간의 고통에로 향하여 어떤 의미에서 열어놓으셨습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고 있는 한 - 세상의 어디에서든 또 역사의 어느 때든 - 그만큼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계의 구속을 성취하신 그 고통을 자기 나름으로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사업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통하여 성취된 구속사업이 인간의 고통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 모든 사랑에 언제나 개방된 상태로 있다는 그런 뜻일 따름입니다. 이미 완전히 성취되어있는 구속사업이 이 사랑의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로 계속해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사업을 바로 최대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성취하셨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종결된 상태에 이르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 구속적 고통을 통하여 세상의 구속사업이 성취된 것이며, 이 구속적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 고통 하나하나에 대하여 당신 자신을 열어놓으셨고 또 끊임없이 그렇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이 끊임없이 완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8. 교회는 박해를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청중에게 고통의 필요성을 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23) 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며, “자기를 버린다.”(루카 9,23 참조)는 조건 아래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윤리적 성격의 요청을 당신 제자들 앞에 명백히 제시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한길이라 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멸망에 이르는 넓고 쉬운길과 대비시키셨습니다.(마태 7,13-14참조) 또한 여러 기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증거자들이 많은 박해를 만나게 되리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박해, 즉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고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이 고통의 복음 제1장은 그 자체 안에 부활의 웅변에 의하여 밑받침되는 용기와 강직에의 특별한 부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수난 죽음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동시에 그분은 당신 고통에 의하여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로 드러난, 저 세상에 대한 승리 속에는 고통이 유독 뚜렷이 등장하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하신 몸에, 손과 발과 옆구리에 십자가의 상흔을 지니고 계십니다. 부활을 통하여 그분은 고통의 승리하는 힘을 천명하셨으며, 당신이 사도로서 뽑으신 사람들과 또 끊임없이 뽑아서 내보내고 계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2티모 3,12)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9. 고통 속에 숨겨진 영적인 위대함에로 서서히 계시해 주신다.

 

세세대대로 인식되어 내려오고 있거니와, 고통 속에는 인간을 내적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힘이, 특별한 은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은총 덕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여러 성인들이 깊은 회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고통 중에서의 이 내적인 성숙성과 영적인 위대함은 확실히 특별한 회심의 결과이며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구속자의 은총과 협력한 결과입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보면 하나의 악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결정적인 선, 즉 영원한 구원이라는 선의 가장 확고한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십자가상의 당신 고통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악의, 죄와 죽음의 뿌리에까지 이르셨습니다. 악의 장본인 사탄을 정복하시고 창조주께 대한 사탄의 영속적인 반역을 타도하신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형제나 자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지평을 열어 서서히 계시해주십니다. , 창조주께로 회두한 세계, 죄에서 해방된 세계, 사랑의 구원 능력을 바탕으로 건설되는 세계의 지평을 점차로 열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효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어떤 의미에서 바로 당신 고통의 한복판을 통하여 이 세계로, 이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 들어가십니다. 무릇 고통의 변형과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밖에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은총이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구원적 고통을 통하여 모든 인간 고통 안에 매우 풍부히 현존하시며, 당신 진리의 영, 위로하시는 영의 능력에 의하여 그 고통에 안으로부터 작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0.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고통을.

 

이것이 전부인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구속자께서는 구속된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게 으뜸가는 분이신 당신 성모님의 마음을 통하여 모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영혼에 사무쳐 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치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태어나실 때의 저 모성을 연속시키시듯이, 죽음에 임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께 모든 인간들에 대한 영적이고도 보편적인 새로운 종류의 모성을 부여하시어, 모든 개인 각자가 신앙의 순례 도상에서 그녀와 더불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긴밀히 결합되어있도록 하셨으며,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지간에 이 십자가의 능력에 의하여 새 생명을 얻어 이제는 인간의 약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11.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고통의 복음에 속합니다. 그것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 각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지적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관심하게 지나쳐 가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곁에 멈추어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곁에 멈추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멈추어 섬이란 호기심의 발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익한 행동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내적인 마음가짐의 개방과 같은 것이며, 그 나름의 어떤 감정 표현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민감한 개인 누구나에게 적중합니다. 인간의 내면을 잘 알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자비심을 강조하고 계시다면, 이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일체에서 이 자비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중의 인간에 대한 자비심의 증거가 되는 이 마음의 민감성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저 동정심과 자비심에만 멈추어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동정심과 자비심이 상처입은 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행동의 자극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결국,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고통 속에서 도움을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어떤 성질의 고통이든 간에 될 수 있는 대로 효과적인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거기에 자기 온 마음을 쏟아 넣으며 물질적인 수단도 아끼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자신을, 바로 를 준다고, 를 타인에게 열어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인간론의 관건이 되는 요점의 하나에 접하게 됩니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는 것(사목헌장 24)입니다.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바로 그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