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죽음의 부하, 고통

죽음이라는 것은 인류의 전염병이요 죽음의 부하는 고통입니다. 죽음을 벗어나는 이는 하나도 없으나, 이 죽음이라는 전염병을 면할 수 있으니 신비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고통을 순간순간 받는 것이 예방주사와 같으니 실은 고통을 싫어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방주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신 후 우리는 듣고 즐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을 이겨나가면 죽음의 부하가 죽고 나니 죽음의 왕이 나타나므로 그때는 부하가 다 죽었으니 왕이 꼼짝 못합니다. 죽음의 죽음에서 죽음을 쳐 없애려면 직접 죽음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먼저 왕을 죽일 수 없으니 그 신하들을 먼저 죽이고 마지막에 왕이 나오면 그때 왕과 싸워야 하겠습니다.

‘죽음의 죽음’의 부하들은 순간순간 당하는 괴로움인데 더 큰 유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무리하게 주시지는 않습니다. 괴로움이 아무리 심하여도 하느님 앞에서는 녹아내립니다. 우리는 괴로움을 받으면 받을 때마다 예방주사를 맞는 것 같아서 이것이 덕능(德能)이 되고 점점 강해져서 앞으로 당하는 괴로움이 문제도 안 됩니다.

- 하느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십니다. 한번에 우리를 와장창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단계에 맞추어 천천히 당신께로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여정에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죽음의 부하, 고통입니다. 고통없이 구원받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그대로 받아야만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수용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떼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갑니다. 목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리하게 고통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주신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괴로움이 찾아올 때마다 ‘아, 예방주사를 맞는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이 예방주사를 계속해서 맞게 되면, 마지막 끝판왕, 죽음을 만났을 때, 죽음이 우리 앞에서 옴짝달싹 못할 것입니다. 이미 이 지상에서 우리가 그들의 부하들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겸손하게 주님께 의탁하며 가지 않는다면 예방주사, 고통을 즐겨 맞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길은 신비로운 길입니다. 신비의 죽음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침묵의 눈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5. 죽음의 죽음을 넘어서

219. 사랑은 죽음의 죽음이요 애덕은 악마의 파멸이며, 십자가상(十字架上)의 죽음은 삶이다. 만사에 침묵함은 참 잘사는 길이며, 허욕, 쾌락, 부정은 죽는 길이다. 허황한 사욕은 병든 의욕이니 여기는 자유도 갈 길도 없는 것이다.

- 죽음의 죽음은 사랑입니다. 악마를 파멸시키는 것이지요.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줍니다. 허황된 자기애, 사욕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습니다. 많은 이들이 참 잘사는 길을 잘 모릅니다. 잘 사는 길은 사욕을 억제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죽는 날이 경삿날이니 성인의 축일은 가장 큰 은혜인 죽음의 은혜를 감사하는 뜻으로 죽은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잘 죽지 못하면 부활도 못합니다.

- 잘 죽어야 잘 부활합니다. 그러니 매일 죽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잘 죽어야, 다음날 기쁜 마음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죽는 날이 경삿날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영광에 있습니까? 하늘의 영광에 있습니까? 하늘의 영광에 있다면, 이 세상에서도 사욕없이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무섭고 떨리는 이 죽음을 정복하려면, 계속적으로 사욕과 싸워 이기는 죽음으로 면역성을 만들어 결승하는 그날에, 영원한 죽음을 쳐 이긴 부활의 개선가를 부르기 위하여, 이 현세에서 죽는 죽음을 수련하는 것이다.

- 매일매일 우리가 죽음의 죽음의 행진을 연습하면, 우리는 승리의 죽음을 이 지상에서부터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부활을 위한 죽음은 매순간 일상에서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들을 달게 받는 것입니다. 죽음의 부하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왕을 만나기 전에 신하들과 병졸들을 모두 없애면, 왕이 꼼짝할 수 없듯이, 죽음의 신하들인 고통들을 만났을 때, 무서워하지 않고 모조리 다 참아받으면, 왕인 죽음을 만났을 때 승리할 것입니다. 침묵대월로 죽음을 넘어가는 것이지요.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 멋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서 죽어야 합니다. 많은 수도자들이,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들을 기어코 하고야 맙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 멋대로’ 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으로, 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불순종으로 이 세상에 죽음과 고통이 들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로 죽음이 무기력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난관을 돌파하면 마지막은 죽음이니,
신력(神力)은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의 죽음이 되는도다.
죽음의 죽음이 최후 승리니, 죽음을 넘어가 영생하는도다.

- 죽음 뒤에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누가 이 죽음 뒤를 보고 있습니까?
눈앞에 닥쳐진 골치아픈 일들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 모든 난관은 우리의 시험입니다.
그 시험을 잘 풀어야 마지막 시험문제를 잘 풀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오는 시험문제를 인내희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거룩한 죽음의 앞에서는 영벌(永罰)의 죽음이 떨며 숨을 못 쉬고 그만 쓰러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