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레 티 타잉 아녜스 (1781~1841, 평신도)

 

 

    순교일: 1841712

    시복일: 190952

    시성일: 1988619

 

 

    성 레 티 타잉(Lê Thị Thành) 아녜스는 1781년에 베트남 타잉호아성() 이엔딩현() 바이 디엔(바이 덴 또는 자 미에우라고도 불림) 마을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 꽤 유복한 집안이었는데,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가지지 못하여 부친이 둘째 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타잉 아녜스의 모친은 열 두 살된 타잉과 열 살된 투옥 두 딸을 데리고 생계를 꾸리러 닝빙성()의 푹냑 마을 동촌()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타잉 아녜스는 열일곱 살에 응웬 반 녓과 혼인하여 아들 둘과 딸 넷을 낳았다. 그 지방에는 마을사람들이 장남의 이름을 따서 부모를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 때문에 타잉 아녜스를 데(Đê)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이다.


    데 할머니 부부는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데 할머니는 주님께 자신을 바친 이들, 특히 외국인 선교사제들과 자국인 사제들을 무척 귀히 모셨다. 그래서 박해 시기 때 데 할머니 가정은 늘 자신의 집에 사제들을 맞아들여 은신하게 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841414일 부활대축일 아침에 타잉 신부를 따르며 도와주던 데에라는 이가 공을 세우기를 원하고 또한 상금에 욕심을 내어 찡 꽝 카잉 총독에게 천주교 사제들의 은신처를 밀고하였다. 꺼 공소회장이 ’(Lý)라는 베트남어 이름을 가진 진 폴 갈리 카를레스(Jean Paul Galy Carles) 선교사제를 데 할머니의 집 정원으로 모셔 대나무숲 고랑 안에 짚으로 덮어 숨겼다. 하지만 달려가는 신부의 그림자를 본 병사가 끈질기게 수색한 끝에 신부를 찾아내어 체포하였다. 집주인인 데 할머니도 천주교 지도자를 자신의 집에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꺼 공소회장과 데 할머니와 8명의 다른 사람들이 목에 칼이 채워진 채로 남딩 옥으로 이송되었다. 데 할머니는 옥으로 이송되는 길에서 칼이 너무 무거워 여러 차례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였다.


    관아에서 찡 꽝 카잉 총독은 달콤한 말로 권유하기도 하였고, 살이 찢겨질 정도로 매를 때리는 등 육체적 형벌로 고문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바짓가랑이에 독사를 풀어 넣는 방법도 사용해 보았지만 결코 데 할머니의 굳건한 신앙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를 뵈러 옥으로 간 딸 응웬 티 누는 피로 물든 모친의 옷을 보고는 슬피 울었다. 하지만 데 할머니는 다정하게 위로하며 말하였다. “얘야, 울지 마라. 엄마는 지금 붉은 장미옷을 입고 있는 거란다. 엄마가 주 예수님을 위해서 기쁘게 고통을 참아 받고 있는데 왜 운단 말이냐?” 딸이 또다시 방문했을 때 데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딸을 타일렀다. “얘야, 엄마의 말을 형제자매들에게 전하여라. 집안일을 돌보고 열심히 신앙을 지켜라. 아침, 저녁으로 경문을 외고 미사를 바치며 어머니가 끝까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기도하여라. 오래 지나지 않아 너희들과 이 엄마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데 할머니는 고문과 극형 외에 먹고 마시는 데도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 이질도 앓게 되었다. 함께 붙잡혀간 수녀가 지극히 간호했음에도 데 할머니는 나날이 기력이 쇠해져 결국 티에우찌왕 시대 1841712일 밤에 옥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나라로 돌아갔다. 규정에 따라 병사가 데 할머니의 발가락을 불태워 사형수가 사망했음을 확인하였다. 교우들이 남 머우 형장에서 장례를 치른 다음 6개월 후에 데 할머니의 시신을 푹냑본당으로 옮겨 모셨다.


    - 출처 : 베트남 순교성인행전(Hạnh Các Thánh Tử Đạo Việt Nam), 베트남주교회의, 2018, 222~223쪽.

 

 

    묵상

 

    성 레 티 타잉 아녜스는 117위 베트남 순교성인들 중에 유일한 여성입니다. 여성에게는 되도록 사형을 금하였던 당시 베트남의 형법으로 인하여 여성 순교자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합니다.


    타잉 아녜스 성인께서는 우리 한국교회와도 작은 인연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4대 교구장이셨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님의 첫 해외 선교지가 바로 타잉 아녜스 성인께서 사시던 푹냑 마을이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님께서는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선교사인 갈리 신부님과 함께 푹냑 마을에서 약 3개월 정도 활동하시던 중에 타잉 아녜스 성인과 함께 체포되셨습니다. (그 후 베르뇌 주교님께서는 갈리 신부님과 함께 당시 베트남의 수도였던 훼로 따로 이송되시어 거기서 약 22개월간 옥살이를 하시다가 프랑스 군함의 요청으로 극적으로 풀려나시게 됩니다.)


    타잉 아녜스 성인께서 기꺼이 자신의 집에 사제들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셨던 모습과 신앙의 힘으로 자녀들에 대한 인간적인 애착을 극복하시고 순교하신 모습은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강완숙 골롬바 복자와 이성례 마리아 복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한 모습은 한평생 오롯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충실히 협조해드리셨던 성모님의 모습과 무척 닮았습니다.


    베트남인들의 문화에서는 농경문화와 유교문화의 영향과 함께 수많은 외침을 겪은 역사로 인하여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공동체의식과 가족애가 강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베트남인들의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애정은 각별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 문화 안에서 자녀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을 극복하시고 순교하셨음은 그만큼 신앙심이 크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34-40; 마르 12,28-34; 루카 10,25-28 참조).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무아 방유룡 신부님께서는 그 가르침을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해야 한다.”(1962413일 강론)고 표현하셨습니다. 불굴의 순교자들께서는 하느님을 자신의 삶의 최우선에 두시고 그분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셨던 분들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가족에 대한 인간적인 정을 초월하실 수 있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혹독한 박해와 죽음의 두려움까지도 다 극복하실 수 있으셨을 겁니다. 베트남에서는 붙잡힌 천주교인들에게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도록 시험하는 방법으로 배교를 유도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일편단심 순교자들께서는 자신들에게 너무도 소중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신앙을 굳게 지키셨지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후손들도 레 티 타잉 아녜스 성인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선조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 만유 위에 주님을 사랑해드림으로써 어떠한 시험의 때가 찾아오더라도 주님의 힘으로 그분과의 소중한 관계를 굳건히 지켜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성 레 티 타잉 아녜스와 동료 순교자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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