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9 대림 제 2주일(루카 3, 1-6)

 

찬미 예수님!

 

성적 올리는 법

1. 채소가게 자식은?.................쑥쑥 올린다.

2. 점쟁이 자식은?....................점점 올린다.

3. 한의사 자식은?....................한방에 올린다.

4. 성형외과 의사 자식은...........몰라보게 올린다.

5. 구두닦이 자식은?.................반짝하고 올린다.

6. 자동차 외판원 자식은?.........차차 올린다.

7. 부동산 중개인 자식은?.........불붙기 전에 올린다.

8. 백화점 사장 자식은?............파격적으로 올린다.

9. 총알택시 기사 자식은?.........따따블로 올린다.

10. 배추농사 집 자식은?..........포기한다.

11. 목욕탕 집 자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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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기다린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라고 합니다. 광야는 우리 유다인들에게는 탈출기를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한 하느님의 영이 머무는 장소로 인식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초기에 수도자들도 사막으로, 광야로 들어가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광야는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그곳은 척박하나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고, 그곳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장소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 수 있다는 체험의 증표로 하느님의 현존을 확신하게 되는 공간입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에게 광야는 어디인가?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영을 영접하고, 그분의 은총과 자비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하는 물음은 그래서 가장 중요하며, 그곳에서의 체험은 우리 신앙의 뿌리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 수녀님들에게는 그곳이 어디입니까? 사실 수도원은 이러한 광야가 모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머무는 공간이고 우리가 기도하는 곳이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만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며 하느님 나라를 미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합니까?

 

어제 저는 우리 형제 한 분과 긴 통화를 하면서 참 잘 알고 있는 형제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의 지향과 그분의 생각이 나와 너무나 다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라고 하면서 실상은 참 남이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형제애를 얘기하면서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었지만 사실 실상은 너무나 먼 곳에 있었습니다. 이는 제 잘못이 우선 큽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거나 그분의 일상을 공유하지 못하였기에 서로 간의 차이는 점점 벌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이라는 공간에서의 수행은 서로 간의 부대낌과 서로간의 우애로서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다름을 인정해야하는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게 되고, 서로의 따스한 배려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몸소 체험합니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나의 보잘 것 없음과 결국 그분께 의탁해야 함을, 그분의 뜻, 섭리를 받아들여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또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죄의 용서. 회개. 이는 사실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동의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 함으로서만 이루어집니다. 죄의 용서의 최종권자인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인간은 어둠 속에서, 자책 속에서 헤매게 되고, 또 이를 극복하고 멀리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욕구 충족과 위로를 추종합니다.

 

사람에 대한 인정과 사랑부터, 지식과 능력에 대한 탐욕, 물건에 대한 집착, 그리고 말초적인 쾌락이나 위안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다 우상이며 헛것이기에 결코 우리에게 자유를, 평안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쾌락의 끝은 공허하다는 격언처럼 우리가 신성을 만나지 않고 순간적인 만족에 먼저 눈을 돌릴 때 우리는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악습의 굴레를 벗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회개. 그분께 돌아가는 것만이. 그분이 가르침을 살아내는 것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손 닿은 데 있는 하느님 나라를 움켜 잡는 것만이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내 안에 차오르는 충만함.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 두려움이 없어지는 경지는 오로지 그분과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고 또 우리 영성의 핵심인 대월인 것입니다.

 

대림 2주가 되어 두 번째 초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삼 주 후면 우리의 분심잡념과 사욕을 이겨내게 해주실 그분이 오십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그분의 대속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다시 나게 됨을 다시 한 번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를 다시 묵상합니다. 친교의 나라, 친교의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인간 존재이기에,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그 사랑의 원천이시요, 사랑 자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간청해 봅니다.

 

오소서. 예수 그리스도님.

다시 오시어 반복되는 악습과 나 자신을 더 중히 여기는 한계를 넘어서게 하소서. 당신의 도움으로만 가능한 일이기에 당신께 간청합니다. 당신의 그 사랑에 협조라는 작은 제 힘을 보태오니 부디 제게 오시어 저를 살려 주소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이사아 예언자가 선포가, 그 소리가 지금 우리에게도 울려퍼지고 있음을 묵상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하소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