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1 연중 제 13주일(교황 주일) - 마태 8, 5-17

 

찬미 예수님!

 

지금 비의 신이라는 태국 이름의 쁘라삐룬 태풍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태풍이 오는 속보를 각 지방 사투리로 보도합니다.

* 여긴 광주.

아따 거 머시기냐 비바람이 장난이 아니구마이.

우리 동네가 홀라당 날라가게 생겨부러쏘잉.

우짜쓰까잉. 불안해 죽겄네잉.

벼락맞아 뒤지는거 아닐랑가 몰겠네잉

* 여긴 부산

아따~~무슨 비가 이래 마이 오노??

우산 어제 샀는데 또 뿌사졌네.. 덴당!!

* 여긴 대구 북부 지방

비 억수로 옵니다. 바람도 쪼매 불고 날씨 겁나 춥네예.

이상 대구라예~ 서울 나와주이소~

* 여기는 서울.

이 좁은 나라 안에서도

이렇게 날씨 차이가 심하니 신기하군요.

* 여기는 여수.

비 허벌나게 내리뿌네 아따~ 죽겄구마.

바람도 이빠시 불고 비도 왔다갔다 신나게 내리고.

암튼 시원하고 좋기는 헌데

피해가 없었으면 하는 조그마한 소망이 있어 부러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야이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이 야이로의 딸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그 유명한 12년 간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과 구원을 우리는 봅니다.

 

저는 복음서의 여러 사화 중에서도 이 열 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이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라고 보도되는데 얼마나 절망과 비탄에 빠졌겠습니까?

그런 여인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그녀는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았습니다. 기적의 힘이 빠져나간 것을 안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찾았고, 그 여인은 그 기적 앞에서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저 당신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이러한 믿음 앞에서 주님께서는 늘 하시던 그 말씀으로 여인을 위로해 주시며 격려해 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얼마나 따스한 말씀입니까? 기적의 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으면 베풀어진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분의 옷자락에 손가락만 닿아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믿음. 그분이야말로 세상의 병고와 죽음까지도 좌지우지할 하느님의 아들, 아니 참 하느님이란 믿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열 두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주님은 야이로의 집에 방문하고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에 그 아이는 자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 아이를 살립니다. 탈리타 쿰. 소녀여 일어나라는 명령으로 그녀를 소생시킵니다. 그 소녀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습니다.

 

이 사화에서 묘하게 겹치는 상징이 있지 않습니까? 열 두해 하혈을 하던 여인과 열 두 살의 소녀의 소생.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2라는 숫자는 완전 수로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병자와 죽음까지도 관장하는 참 하느님임을 더욱 강조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소생시키자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고 합니다. 그렇지요. 병자의 치료,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은 예언자들이 가끔 보이는 기적이기도 했지만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물리적 자연 법칙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권능이기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기적 앞에 그저 놀라고 얼이 빠질 뿐인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열 두 해 하혈하던 여인의 그 간절한 믿음에 주목합니다. 그저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다면.

 

어제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을 쓴 박완서 작가의 절절한 고백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상정하고 탐구하는 이들의 자세가 어찌해야 할지 조금 언급하였습니다. 오늘 이 하혈하던 여인을 통해서 우리는 또한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 지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깊은 신뢰 앞에서 주님은 우리를 따스하게 바라보시면서 그래 너의 믿음이 너를 살릴 것이다. 나는 너의 믿음에 상응하여 언제나 너를 보호하고 지켜주며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교황 주일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는 베드로 바오로 대축일에 가까운 주일에 이 교황 주일을 지냅니다.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현 시대의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교종 프란치스코와 문재인 디모테오 대통령이십니다.

 

이 두 분을 뵈올 때면 마음 깊을 곳에서 진정으로 그분들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참 많은 이들이 위인이라 칭해지고, 수많은 영웅들이 있는 이 시대에서도 왜 유독 이 두 분이 저를 달뜨게 할까요?

 

우선 그것은 그분들의 진심이 그분들의 말과 행동에서 전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살아왔던 인생이 묻어나는 행보가 추상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고, 지극히 실재적이며 현실적이라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북돋우는 것은 그분들의 언행은 참으로 복음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교회의 최고 어른을, 우리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제가 존경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어쩌면 그분들을 직접 만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과 공간을 격해서라도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정말 영광입니다. 이분들은 저에게 참 지도자로 참 사람으로 살아가야할 길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교황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이 미리 보여주시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에 저는 참으로 깊이 동의합니다.

 

그분이 제시해 주시는 친교와 일치의 관계. 그러한 공동체가 바로 이 시대 우리가 살아내야 할 하느님 나라라는 것에 지극히 동의합니다.

 

그리고 제가 틈만 나면 외치는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을 제시해주신 그분의 말씀.

 

사막으로 가라. 하느님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두리로 가라. 가난한 이들 안에서 절박하게 하느님을 찾고 부르짖어라. 그리고 너의 약함과 악함까지 드러나게 하고, 그것을 하느님께 드러내고 봉헌하고 화해하라.

변방으로 가라. 위험 안에서 불안 안에서 또한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하라. 는 그 말씀을 아직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수녀님들의 세심한 배려 안에서 사막, 변두리, 변방의 지향이 약간은 희석 되었지만 아직은 그분이 부르시면, 공동체가 명령하면 어디라도 어느 때라도 달려갈 원의가 있습니다.

수도자라면 수도 생활 안에서 주어지는 불안과 험난을 달게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단련하고 긴장해야 하겠습니다. 편히 안주하고 소소한 감정 안에서 시기하고 미워한다면 얼마나 비루하고 번잡합니까?

우리는 축성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거룩하게 됨을 하느님의 손길로 공적으로 받은 이들이 아닙니까? 옷자락만 잡아도 살아날 것이란 믿음을 지녔던 하혈병 앓던 여인이 본다면 얼마나 부러워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더 부끄럽겠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큰 축복과 기적을 우리 존재로서 체험하고 받아들인 이들입니다. 기쁘게 웃으며 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진실을 위해서, 조금 더 선함을 위해서, 조금 더 아름다움을 위해서 그렇게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권리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