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7 부활 제 7주간 목요일(요한 17, 20-26)

 

찬미 예수님!

 

국어 선생님이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문제를 냈습니다.

<술에 취해 거리에서 큰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사자성어로 무엇이라고 할까요?> 답은 고성방가지요.

그런데 오답들이.

-고음불가?

-미친건가?

-이럴수가?

그 때 한 아이의 답에 모두가 뒤집어졌답니다.

 

-아빠인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부활 마지막 주간인 요즘은 계속해서 요한복음이 봉독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매우 다른 양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행적 등 사실 위주의 기술이라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내면을 잘 드러내주는 독백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 봉독되는 복음들을 보면 얼마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절절히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추측컨대, 예수의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 사실 요한학파가 기술하였다는 것이 더 정확하지만 저술하였기에 더욱 예수님의 마음을 생생하게 그렸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 첫머리에서 주님께서는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니다.

 

제가 띠앗머리라고 탈북 청소년, 청년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하는 사도직을 맡고 있기에 북에서 온 이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그 중 한 친구와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말이 북한에서는 종교를 아편에 비유하고 매우 나쁘게 교육을 받았기에, 한국에 와서도 처음에는 매우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가톨릭을 믿었고, 그래서 그럼 어떻게 가톨릭을 믿게 되었는가? 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친구 말이 자기는 아직 하느님을 잘 모르겠고, 교리도 잘 이해가 안 된다고 고백하더군요.

하지만 신부님이나 신자들 특히 수녀님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자기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위해주고, 또 그분들의 삶이 자신이 보기에 참 좋아보여서 그래서 천주교를 택하게 되었다고 솔직히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찌릿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의 언행이나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들이 어떤 이들의 선택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종교를 거부하던 이들이 달라지고 그 기준이 우리의 삶의 태도라는 증언을 접하니 참 놀랍고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듣고 믿는 이들에게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 바탕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한 하느님, 신성, 그분의 가르침인 가치들을 따를 때 오는 기쁨이 중요할 것입니다.

내가 내적으로 충만히 그분을 따르고 있다면 선교나 전교는 저절로 될 것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역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삶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신성과 함께해야하는 삶이어야 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친교의 삶, 가치 중심적인 삶은 약간은 팍팍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지향점임은 분명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의 사도직에서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그 에너지로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은 늘 유효합니다.

 

주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그분을 모시고, 우리 옆에 그분이 계시는 삶을 사는 게 우선이 아닐까합니다. 그리하면 세상이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인 우리 주님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반드시 믿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