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언젠가 새남터 성당에서 수도회의 행사를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한 형제가 맡은 바 소임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가 고민하고 있을 때, 어떤 다른 형제가 조언을 했습니다. 그 형제는 그가 하려고 했던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하며 이렇게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조언을 하는 그 형제의 모습이 제가 알고 있던 그 형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조언을 하는 모습은 참으로 어른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나 같았으면 그 일을 제대로 못했다고 윽박지르고 나서 이야기 했을텐데..’하며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모두가 나의 뜻에 맞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현상이나 일을 보더라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것이 낫다 혹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라는 등 다른 의견들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때로는 서로의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관계가 멀어지게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나의 뜻이 나오게 된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준은 언제나 나 자신이 됩니다.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를 중심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때문에 를 보지 못하고 나의 의견에 사로 잡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율법의 기본정신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웃사랑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이야기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웃사랑 역시도 하느님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뿐만 아니라 어떠한 일을 결정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내 눈에는 아무리 못나 보이고 무능력한 사람일지라도 하느님 눈에는 그저 똑같이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안에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처럼 넓은 가치관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이유는 삶의 다양한 기준을 알아가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판단의 기준을 나에게만 맞춰두면 우리는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 나의 의견보다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속상할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의견이든 다른 사람의 의견이든 어떤 의견을 수용하더라도 결과는 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유를 가지고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때로는 여유가 사치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 동안 만큼은 율법의 기본 정신을 되새기며 우리 삶에서 여유를 찾아 본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