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9-22일 산들평화순례피정에 참여하신 박세실리아 자매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교정을 부탁하셨지만 자매님께서 느끼고 묵상하셨던 고귀한 표현들이 손상될 것 같아 그대로 옮깁니다.






나의 제주도 성지순례 여행기 


  절호의 챤스가 왔다. 주보를 보니 제주 면형의 집 피정이 있다. 더구나, 이번 피정 길은 추자도 순례가 포함된 34일 여정이었다. 자리가 있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전화를 했다

  제주 성지(聖址)순례는 몇 년 전에 한번 다녀왔는데, 그 때 추자도는 갈 수 없었다. 사실 추자도는 순교자가 밟은 땅이 아니라, 순교자의 아들이 살았던 곳이니 엄격히 말하면 성지는 아니다. 그래도 추자도는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일요일 9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했다. 나는 복자수도원 면형의 집에서 하는 순례 피정이니, 수녀님들이 있는 곳으로 알았는데, 제주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남자수도회 수사신부 두 분이었다. 복자수녀원에 친구가 몇 명 있으니, 수녀들이 운영하는 피정의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완전히 나의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나이에 맞게 깊이 생각하고 알아보는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했다

 

  제일 먼저 황사평 성지를 찾았다. 황사평 성지는 지난번 성지순례 때에도 찾아 왔지만, 전혀 새로운 안목을 갖게 했다. 베드로 신부님께서 신축교안(辛丑敎案)을 설명했다. 1901년 정부의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 때, 도정책임자와 봉세관은 피신하고, 봉세관의 하수인이 되었던 일부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사건의 발생원인은 프랑스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독점하려던 일본 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한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했다.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진 민란이 신축교안이라는 것, 이재수의 난이라 부르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이 때 희생된 신자 수는 300명이 넘는데, 1903년에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무연고 묘를 이장하고, 1998년에는 외국인 성직자 공덕비와 제주 출신 최초의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도 세웠다. 납골당도 세워져, 얼마 전에 성당에서 기도하는 중에 이유없이 피살당한 성서봉사자가 그곳에 있다하여 들어가 찾아보았으나, 쉽게 찾을 수가 없어서 기도만 하고 바로 떠나야했다.

  뒤이어 4.3 평화공원으로 이동했다. 나는 제주 4.3 사건을 잘 몰라서 영화 지슬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 여행길에서 제주 4.3 사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부에 의해 자행된 공권력의 횡포를 읽어 낼 수 있는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아기까지 학살한 슬픈 우리의 역사를 읽었다. 기념공원에는 아기를 안고 죽어간 부녀자의 조각상이 있었다. 기념관을 만들어 후손들이 깨어 있어야하는 이유, 우리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가 강대국 사이에 제물이 되고 있는 슬픈 진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다.

  그 다음은 제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순교한 김기량 펠릭스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보 순례 길을 지나 순례비가 있는 그의 고향으로 여정이었다. 무속신앙의 영향이 강한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믿음의 씨앗을 뿌린 제주의 사도이자 최초의 순교자인 김 기량 길은 바닷가 해안을 따라 가는 길이었다. 일단 먼저 조천성당에 도착했다. 신부님은 마치 1인극을 공연하는 것처럼 김 기량의 삶을 설명해 주었다. 제주 조천읍 상인의 집에서 태어난 김기량(金耆良, 1816-1867)은 배를 타고 장사를 했다. 그는 18572, 약재와 그릇을 싣고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처음 하느님을 알게 되고, 1857년 성령강림 주일에 영세를 받았다. 오묘하신 하느님의 섭리가 김기량을 바다에서 건져 올려 살려주고, 세례를 받게 하여 제주에 복음을 전하게 한 것이다. 고향을 떠난 지 12개월 만인 18584,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과 사공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체포되었다. 통영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김 기량은 곤장 60대를 맞고도 목숨이 붙어있자 관장은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특히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671(음력 196612)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그가 순교하는 대목에서는 죽을 만큼 곤장을 맞고도 또 살아나기를 반복하자, 가슴위에 대못을 박는 신부님의 연기에 나는 그 고통이 전해지는 듯 가슴이 아파왔다. 죽을 때까지 매 맞는 극심한 고통을 어떻게 참으며 순교했을까? 순교는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것이라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특은을 베푸시어 고통을 인내하고,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용기를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내가 이러한 경우를 당하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참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복자위에 오른 김기량 순교자의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신앙에 대한 열정에 감탄하며, 지금의 내 안일하고 나태한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례길에서 한 순례자가 넘어져 일어나지를 못했다. 119를 불러 병원으로 간 그는 팔이 부러져 있어, 병원 치료를 받은 후, 가까운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바로 상경한다고 했다. 같은 본당 신자들은 계속 그를 위한 생미사를 봉헌했다.

 오후 늦게 산을 넘어 서귀포에 위치한 피정센터 면형의 집에 들어서니, 250년된 녹나무가 우람한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아주었다. 일요일에 일찍 집을 나섰으니,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깨끗한 독방에서 첫 날을 보냈다.


  둘째날에는 성무일도와 새벽미사로 하루를 열었다. 오전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제주 둘레길 7코스중에 서귀포 외돌개에서 법환포구까지 걸었고, 다른 사람들은 강정마을을 향했다. 나는 7코스 전체를 우리 성당 봉사자들과 여행왔을 때, 이미 걸었으므로 궁금했던 강정마을로 갔다. 길 위에 있는 천막에서 미사를 참례하고, 해군부대 앞까지 평화대열에 함께 했다. 또 마을 안에는 문정현 신부의 무고한 옥살이 대가로 받은 배상금으로 구입한 땅에 제주교구가 앞장서 기금을 마련하며 만든 강정생명평화사목센터인 성프란치스코 센터가 지어져 있어 그곳에도 방문했었다. 센터에는 강정마을 주민 신자분들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강정 공소가 2층에 있었고,  제주교구 천주교 신자들과 종교를 넘어 제주도민들,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평화를 교육하며 알리는 공간들을 볼 수 있었다. 센터를 둘러보는데 우리 약소민족의 설음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오후에는 늦가을 제주의 명승지인 새별 오름으로 트래킹을 갔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것이 마치 윤슬처럼 보이는 갈대밭을 올라갔다. 오름은 경사가 심하여 버스 기사가 준비한 대나무 지팡이를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오름 꼭대기까지 오르니 눈앞에 보이는 바다와 산과 갈대들이 어울어져 한편의 영화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갈대밭 사이사이에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어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기념사진으로 남겼다.

  저녁후에는 루카 신부님께서 순례자들 마음을 열수 있도록 게임을 유도하는데, 한참을 어린이처럼 웃울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을 갖게 했다.


  셋째 날에는 바로 제주항에서 배를 타고 추자도로 행했다. 9월과 10월에는 일기가 좋지 않아서 추자도를 갈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추자도를 들어갈 수 있다고 누가 이렇게 기도를 열심히 했지요?’ 신부님이 즐거워하셨다. 추자도는 남 북을 교량으로 연결한 섬인데, 다리가 놓이기 전엔 추자 공소가 있는 북 추자도와 황 경한 묘가 있는 남 추자도를 가려면 또 배를 타야만 했을 것이다. 상추자도에 위치한 추자 공소에는 신자수가 적어 주재하는 선교사가 공소를 유지하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따르니,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면서 순례객으로 하여금 미사때에 봉헌금을 내게 하고, 그것을 공소 유지비로 사용할 수 있게 선교사에게 전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이 미사 봉헌을 했다. 오후에는 하추자도의 황경한 묘를 찾아 갔다. 황경한은 백서(帛書)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의 아들이다. 황사영은 1790년 진사시에 급제한 해에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인 정난주(丁蘭珠, 본명 命連)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에 관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시킨다는 판결을 받는다정난주는 젖먹이 아들이 평생 노비로 사는 것을 피하고자, 유배를 가던 도중에 호송선의 뱃사공을 매수하여,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의 황새바위에 아들을 남겨 놓는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성장하게 된다. 경한이 그때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월일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되었다.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建燮)과 태섭(泰燮)을 낳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아들과 어머니의 사연을 열연하는 신부님 덕에, 순교자 가족의 숨어 흘린 눈물을 생각하며, 순례자들의 눈길도 젖어들었다. 순교자들은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다(23.4)’ 하느님과 함께 하는 믿음,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으로 순교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 분들의 발자취를 뒤쫓는 우리 순례자에게도 당신들 닮은 신앙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제주항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이미 해가져서 어두운 상태에서 관덕정에 들러 제주 교난때 목을 베인 자리로 순교자들을 잠시 묵상하고 돌아왔다.


  넷째 날에는 이시돌 목장에 만들어 놓은 새미 은총의 동산을 향했다. 이시돌 목장을 만드신 임피제 신부님이 쉬며 기도하는 곳을 목장 한편에 조성해 주신 것이었단다. Sanctus(거룩한), Anima(영혼), Evanglium(복음), Mediator(중재자). Imago Dei(하느님의 모상). 두문자를 따서 지은 이름의 의미가 깊었다.

  예수님 생애공원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도록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전 생애를 대형 부조로 만들어 놓았다. 십자가의 길 각 기도처에도 대형부조를 만들어 묵상에 도움을 주었다. 묵주기도의 호수에는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이어진다는 삼뫼소라 이름 지어진 곳이다.

  새미 은총의 동산은 예술작품으로 재현된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거룩한 복을을 전하고자 조성된 공원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영혼을 중재하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만든 이의 뜻을 전하고 있다.

  오후에는 대정에 있는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의 묘를 찾아갔다. 정난주는 정약현의 딸로 1790년에 황사영과 혼인을 하고, 1800년에 황경한을 낳았다. 전날 아들을 찾아보고 왔으니 어머니 묘에서 그 소식을 전했다. 기구한 운명으로 황경한은 오씨 성을 갖은 사람에게 양육되었고, 어머니 정난주는 김씨의 자식을 키웠으니, 하느님은 어떤 섭리를 하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정난주는 황사영의 부인이기에 제주에 관비가 되어 살았기에, 피흘려 순교한 것은 아니나 백색 순교자라고 기리고 있는 것이다.

  오후에는 김대건 순례길을 걷고, 신부님이 표류하신 곳을 찾았다. 기념관에 들러 그분의 일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버스로 공항으로 이동했다.

  제주교구에서 정한 순례길 일부와 의미있는 성지를 방문하여 순교자들의 행적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려는 다짐을 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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