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말씀을 통한 치유를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logos), 바로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대림 시기를 보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다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곁에 머무시며(요한1,14) 우리를 끊임없이 당신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백인대장의 간청은 우리가 미사 중에 드리는 기도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성체를 모시기 직전 드리는 기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새로운 미사경본에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바뀌었습니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인간의 구성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창설 신부님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양심과, 이와 대립 관계에 있는 사욕, 그리고 자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영혼 안의 양심을 따르느냐 사욕을 따느냐는 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선택하는 특권입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진 이유는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는 인간이, 그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하느님께 끊임없는 응답을 드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성장 혹은 인간의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되어 감의 여정에 기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근본을 두고 머무는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이는 인간의 자유를 살리는 길인 동시에 완성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모시며 우리의 영혼이 낫게 해달라고 드리는 이 기도는 바로 인간을 온전한 자유로 이끌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양심을 따르던, 사욕을 따르던 언제나 선택은 자유를 가진 우리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존재할 때에 가능해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백인대장은 수하에 백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자신의 종을 낫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그저 한 말씀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도 말 몇 마디로 수하의 사람들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상관의 명령에도 따르고 자신 역시도 지시하는 입장에 있는 백인대장은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말씀만으로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도 예수님께 속한 종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만으로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는 백인대장의 이러한 믿음은 바로 이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우리 삶의 주인을 주님이신 예수님으로 모시는 것이지요.

우리 삶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모실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자유라는 것은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 즉 그리스도와 동화될 때까지 인간의 역동성에 맡겨진 하나의 소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닮으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간청한 것은 그분을 닮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려는 나태와 일종의 안주에서 벗어나게끔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라고도 하는 인간 영혼 안의 양심은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을 때에 아파하고 힘들어 합니다.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백인대장의 종처럼 말입니다.

어느 덧 오늘로써 마지막 부제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년 간 부제직을 수행하며 써 내려간 강론들을 떠올려 보면, 가난과, 겸손 그리고 믿음이라는 주제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 주제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종합하여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삶의 목표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 토요일, 인사 명령을 통해 새로운 소임지가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임지에서의 사도직은 총장 신부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형제애를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로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자리가 무엇을 향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존재는 오직 하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각자의 소임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수도자가 될 수 있기를 간청해 봅니다. À bientôt!(조만간 봐요! 곧 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