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얼마 전 내 친구 정일우라는 다큐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회 신부로서 1967년부터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다가 2014년에 돌아가신 고()정일우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삶을 봉헌하신 분이셨습니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서, 또 당시 예수회의 수련장으로서의 소임을 맡고 계셨던 신부님은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생각에 모든 소임에서 물러나, 1970년대에는 청계천 판자촌에서, 1980년대에는 상계동 철거민들의 살 권리를 위해 도시빈민운동을 하셨습니다. 당시 88서울올림픽 준비의 일환으로 도시 정비에 힘써온 정부는 지저분하다고 판단되는 서울의 여러 동네에 대한 정비를 그곳 원주민들의 삶의 권리를 무시한 채 감행하였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원주민들은 강제로 철거되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그저 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고() 정일우 신부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강제철거집행을 최대한 저지하려 노력하며 빈민들과 함께 텐트를 치고 그들과 동고동락하였습니다. 미국인인 정 신부님은 정부의 입장에서 눈엣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고,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도 많았다고 영화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상계동 철거 현장에서 텐트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괴한들에 의해 텐트가 무참히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그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신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텐트가 찢어져서 우리는 더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더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더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합니다.’

우리는 가난을 떠올리면 벗어나야만 하고, 피하고 싶은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수도자들은 그 가난을 살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가난, 자발적인 가난을 서약하는 이유는 그 가난이 사람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해서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 신부님의 일생을 보며 진정으로 가난한 것은 무언가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 가지려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텐트가 찢어져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도 정 신부님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난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지만 이 선택은 개인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봉사의 삶을 위한 선택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봉헌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개인의 명예나 어떤 이익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쓰여 질 하느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누구나 다 더 갖고 싶고, 더 누리고 싶은 욕심은 있습니다. 여기서 강론을 하는 저 역시도 시시때때로 개인적인 소유욕에 사로 잡혀 욕심을 부릴 때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욕심을 하느님을 위해 사용할 줄 하는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욕심을 통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단순히 무조건 가난하게 살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가난한 가운데 모든 것을 봉헌한 과부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 삶의 주인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신 주님을 위한 봉헌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같은 지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만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는 다릅니다. 또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난 역시도 다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하느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며 헌금을 한 가난한 과부와 같이 내 삶의 자리에서 실질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과연 나는 내 삶의 주인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